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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8 조회수739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Lk.10,27)



제1독서 칼라티아 1,6-12
복음 루카 10,25-37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두 종류는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과 인생을 완전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두 종류의 사람 중에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편한 삶을 위해 물질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하며,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나의 이웃과의 관계 역시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나만 편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의 편함을 방해한다면 과감하게 끊어 버리겠다고 말하지요.

반면에 완전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인간적으로 올바른 삶, 그래서 완전해 보이는 삶은 그로인해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닌 이웃중심의 삶,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랑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전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매우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편안한 삶일까요? 아닙니다. 편안한 삶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리고 이 편안한 삶은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삶이라고 했으며,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한 가지 비유말씀을 해주시지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뒤이어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보다 비록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사랑을 실천하여 참된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초주검이 되도록 만든 강도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는 범죄자에 대한 체포 여부가 가장 큰 관심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즉, 인간 세상은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사랑으로 옳게 이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귀찮다는 이유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우리의 모습은 없었을까요? 우리들은 죄인에 대해서만 단죄를 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사랑 없음보다 ‘죄’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자신은 짐짓 의인인척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복음에 나오는 사제, 레위인의 모습인 것이지요. 율법을 몰랐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이 피해자를 보고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누가 이웃입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거룩한 사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행동은 이해를 동반하며, 지식을 지혜로 변모시킨다. 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타고르).



저의 10월 일정. 이번 10월은 그래도 여유가 있지요?



사랑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삽시다.

영화를 2배속으로 빨리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할 때 또는 내용이 지루할 때 빨리 돌려 볼 수 있는 기능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기능을 사용해서 보게 되면 내용은 알지만, 이 안에서 얻는 감응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속도를 내어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보다 더 많은 책을 빨리 읽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하면 내용은 알게 되지만 책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화도 책도 정상적인 속도로 보아야지만 그 안에서의 감응도 클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실 우리의 삶을 보면 ‘빨리 빨리’에 너무나 많이 익숙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 더 빨라야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좀 더 능률적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중요한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은 나중에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고,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면서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 기준은 바로 사랑에 있음을 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까요?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자그마한 ‘사랑’도 소홀히 하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책에서 본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 봅니다. 이 글을 보며 내가 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보세요.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 만큼 덕(德)이 쌓이고 한 달을 살면 한 달을 사는 만큼 덕(德)이 쌓여야 할 텐데,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사는 그 만큼 또 한 달을 살면 한 달을 사는 그만큼 업(業)을 짓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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