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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상과 선교는 하나다(contemplation and mission is one) -행복한 사람들- '12.10.13. 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3 조회수343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2.10.13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갈라3,22-29 루카11,27-28

 

 

 

 

 



관상과 선교는 하나다(contemplation and mission is one)

 

-행복한 사람들-

 

 

 

 

 



총회 발표 시 잊혀 지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Home is where the monastery is(고향은 수도원이 있는 곳이다)”

 

“Mission is outside the monastery(선교는 수도원 밖에 있다)”

 

위의 경우는 우리 말 보다 영어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수도원 대신 믿는 ‘나’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내가 있는 곳 바로 거기가 고향이고 바로 선교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하느님 계신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틸리엔 121명 수도형제의 구성 멤버가 인상적입니다.

오스트리아1, 벨지움1, 중국1, 프랑스1, 일본1, 스페인4, 탄자니아1,

미국1, 베트남1, 크로아티아1명 외 독일인들입니다.

말 그대로 국제적인 수도원으로 하나의 세계 같습니다.

 


새삼 하느님이 모든 이들의 고향임을 깨닫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본고향인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에 온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독일 수도형제의 날카로운 질문도 잊지 못합니다.

 


‘관상적인 성격(the contemplative character)’을 지닌

요셉수도원에서의 삶이 선교를 목표로 하는 오틸리아 연합회 안에서

과연 편안할 수 있을 런 지 물었습니다.


순간 떠오른 대답은 순전히 성령의 도움이라 믿습니다.

 

“I think that contemplation and mission is one(나는 관상과 선교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관상의 자리이자 선교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선교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진정 믿는 모든 이들이

관상가이자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날의 말씀으로 선정된 저의 보고서 한 대목도 나눕니다.

 


“Our missionary field is not outside the monastery but the monastery itself where we invite guests and take care of them(우리 선교의 장은 수도원 밖이 아니라 손님들을 맞이하고 돌보는 수도원 자체이다).”

 


이 또한 관상과 선교가 하나로 융합된

수도원의 실재를 보여주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우리 믿는 이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관상과 선교의 일치의 모범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살았던 사도 바오로는

정말 자유인이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관상과 선교의 일치를 살았기에 이런 체험적 깨달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느 여자와 예수님과의 주고받는 문답도

이런 깨달음으로 인도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여자의 마음을 아는 이라면 참 대답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고 싶고,

잘 난 아이를 보면 나도 저런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

여자의 본능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잘 난 모습을 보며

같은 여자로서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부러움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완전히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그 여자는 물론 우리 모두를 자기(ego)의 좁은 시야에서

드넓은 시야의 하느님께로 활짝 열어줍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이런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한 말씀이 우리의 행복 개념을 드높은 경지로 업그레이드 시켜줍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는 참 행복임을 밝혀 줍니다.


이 말씀이 참 행복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진정 관상가이자 선교사이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렇게 살 때 참 행복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님이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행복한 분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 흰 머리에 흰 수염의 어느 독일의 노 아빠스님과의 짧은 문답도

생각납니다.


저에 대해 늘 호감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Are you hungry?(너는 배가 고프냐?)”

 


저녁 식사에 참석하기 전 웃으며 저에게 물었고

저는 익살스럽게 대답했습니다.

 


“I am hungry for God(나는 하느님을 배고파한다)”

 


제 대답에 서로가 100% 만족하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정말 배고프다느니’, ‘약간 배고프다느니’ 평범하게 대답했다면

정말 재미없었을 것이고

이 대답이 서로의 내적시야를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어 준 것입니다.

 


이 대답 하나로 강론 쓰는 지금까지 행복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관상과 선교의 일치의 삶을 살 때

샘솟는 지혜와 유머에 행복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관상가(contemplative)로 만들어 선교사(missionary)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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