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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증 장애아를 입양한다 [한 사람도 버려지지 않는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3 조회수291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10,17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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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복음 말씀을 접하니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너무도 실제와 관련이 밀접한 말씀인지라 '눈물까지 조용히 흐르는 지경' 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른 중년의 나이에 현실에 편안히 안주하려고도 싶겠지만 자신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보잘것 없는 이 하나에게 '내어 주는' 고통스러운 사랑이었습니다. 버려진 이 아이의 고통은 전부가 자신의 고통이었습니다.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여기서 구원적인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왜 외아드님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했을까요. 왜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을까요.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구체적인 죄들의 결과로 판단하는데에는 크게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인간 역사에서 개인적 행동과 사회적 과정의 죄스런 배경에서 분리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비판 기준을 배격할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인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그렇습니다. 인간의 고통에는 세상에 뿌리깊게 내려져 있는 인간의 죄악성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죄스런 배경에서 고통을 주기 때문에 보잘것 없는 사람(약자)들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인간 고통의 근저에는 죄와의 복합적인 연루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의 세계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육신의 고통이든, 영혼의 고통이든 인간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고통의 세계에 다가오심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바로 이 고통을 수단으로 하여 ...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류 역사와 인간 영혼에 뻗어 내려져 있는 악의 뿌리를 쳐부수셨던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지금까지 줄곧 '악의 토양'과 '사랑의 토양'에 대해서 많은 말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악의 꽃(악의)'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악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악한 것들을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악의 토양'이 형성되어 집니다. 그 반대로 거룩한 것들의 공유(사랑인 것들의 공유)가 이루어지면 '사랑의 토양'이 형성되어 집니다. 곧, 사랑의 편에 서면 사랑의 토양이 생기고, 악의 편에 서면 악의 토양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교황님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악에 대한) 해방은 외아들 그분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며 인간을 위한 사랑, 구원적인 사랑입니다."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고통 속에서 도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시고 인간 고통을 바로 당신 자신에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이 몸 안에서 대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비단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받고 있을 뿐만아니라 또한 자기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창조적 고통에 관한 진리의 절정을 이룹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이가르침은 진정 어긋남이 없습니다.

복음적 가난의 정신으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보잘것 없는 이 하나'를 예수님에게 해 준 것처럼 자신을 내어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해 가지만, 예수님시대의 그때나 다름없이 지금도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 오해를 받는 일을 겪으셨을 뿐아니라 점점 더 소외를 당하고 적의에 둘러싸이게 되셨으며" 자기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여전히 악한 것들의 공유가 다른 모습의 변화로 '악의 토양'이 남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의 토양(하느님의 나라)만이 '더러운 영'을 물리친다는 어제 금요일 예수님의 복음 말씀에 영적으로 어두운 탓에 시대가 흘러도 바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입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또한 현세에서 '이 사랑'은 아이를 입양하여 집과 자매(또 다른 한 아이를 입양)와 어머니와 토지를 받을 것이다 하십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어머니나 아버지,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보잘것 없는 한 사람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자신)을 버리고(내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그도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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