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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0 조회수518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Ever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the on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Lk.12,10)


제1독서 에페소 1,15-23
복음 루카 12,8-12

언젠가 어떤 성당의 야외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당 신자 모두가 참석하는 흥겨운 자리였지요. 그런데 운동장 마당에 걸려 있는 축하 현수막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고 이 바람에 의해 현수막이 찢어 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보통 야외에 설치하는 현수막은 일부러 가운데에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놓지요. 그래야 바람에 흔들려도 찢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설치된 현수막은 구멍 하나 없이 대신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겨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의 예상대로 현수막은 행사가 시작될 때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이 현수막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사의 끝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귀가 유혹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즉, ‘완벽함’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결국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 싫어하셨던 이유가 이해됩니다. 자신의 틀 속에 다른 인간들을 가두어 놓고 절대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지요. 이 틀이 완벽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숨구멍 하나 없이 꽉 막혀 바쁘고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처럼 완벽함을 이유로 바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쓰는 마귀의 전력이랍니다. 물론 바쁜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바쁘면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문제들에 신경 쓰면서 정작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많은 일’을 하려기보다는 ‘바른 일’을 하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많은 일을 통해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른 일을 통해서만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곧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죄를 말합니다. 사실 진리는 권력과 폭력 앞에서 꺾이기 쉽지요.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바른 일’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에 꺾여서 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대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바른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인생은 복잡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어떤 길을 계속 가고 다른 길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제일 나쁜 것은 자신이 길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평생 의심하는 것이다(파울로 코엘료).



답동성당 야경. 언제나 이 자리에 있으면서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이기적인 이유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라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에 대해 친구가 반론을 던집니다. 길을 가다가 거지에게 적선하는 선을 베푸는 것은 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토마스 홉스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거지에게 돈을 준 것은 단순히 거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자신의 돈을 받고 기뻐하는 거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는 도움을 주고서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은혜도 모른다면서 화를 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기적인 이유로라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통해서도 행복할 수 있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의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들은 행복하지 않다고 할까요? 혹시 행복할 수 없는 길로만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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