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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사와 선교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0 조회수870 추천수14 반대(0) 신고



2012년 나해 전교주일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복음: 마태오 28,16-20






베로니카의 수건


엘 그레코 작, (1579),  톨레도 성 십자가 성당


     < 성사와 선교 >

      이 세상에는 영원히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유명한 사람은 진시왕일 것입니다. 그는 적들이 침입해 자신을 죽일까봐 지금 봐도 거대하기만 한 만리장성을 쌓았고 또 불로초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50세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죽기만을 위해서 태어나셔서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30년 남짓 살았지만 단명하신 분입니다.

인디언 속담엔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참으로 죽을 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질 때이다.”

이 인디언들의 말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살기 위해 노력했던 진시왕과 죽기 위해 노력했던 예수님 중에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그리스도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고, 진시왕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의 목숨을 이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방법을 아셨던 분입니다. 당신이 영원히 사시기 위해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기억되기를 원하셔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그 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마음속에 그 분을 살게 합니다.

 

저는 다행히 부모님이 다 생존해 계십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일에서 돌아오시다가 초코파이와 산도를 사 오셨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고, 어머니는 밭에 나가서 일하시다가 받아오셨던 빵과 우유를 주셨던 것, 당신 먹지 않으시고 삼겹살을 구워주시던 모습 등이 기억에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저희가 항상 잘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집에 쌀이 떨어져 꽤 오랜 기간 라면만 먹으며 산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라면에 너무 질려 짜증을 내었는데 어머니가 더 짜증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먹기 싫으면 숟가락 놓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녁을 굶고 울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먹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하셨지만 라면밖에는 끓여줄 수 없는 부모의 입장은 굶고 잠이 든 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할 때 먹는 것에 관한 것들이 이렇게 많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은 부모님이 먹는 것을 통해서 제 안에 들어와 사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버지와 함께 일도 해 보았는데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셨다고 생각하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또한 유학하면서 혼자 음식을 해 먹고 방청소를 해 보니, 혼자 몸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우리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조금은 상상이 갑니다.

어쩌면 부모님은 당신 자신들의 희생을 음식에 넣어서 우리를 기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돌아가셔도 자녀들의 마음속에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실 수는 없어도 우리 마음 안에서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분들의 희생을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빵과 포도주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빵은 으깨져야 하고 불의 뜨거움을 견뎌야 합니다. 포도주는 밟히고 으깨져서 피와 같은 즙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누룩이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양식이 되기 위한 희생은 더러움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상의 묘를 방문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그 분들이 아직도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은 우리를 먹이시며 죽으셨기에 그 모습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를 죽여 상대의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들어가 사셨기에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성사라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들어와 사시기 때문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교회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하면 그 분은 내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그러니 나도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것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하게 하시는 방법은 이 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전에 카시아의 성체기적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 사제가 병자성사가 나서 성체를 성무일도에 넣어 가져가보았더니 성체가 피가 되어 성무일도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성무일도 두 장은 각각 다른 곳의 감실에 모셔져있습니다.

성무일도는 종이에 불과합니다. 감실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감실에는 성체만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가 그 종이에 흡수되어 버렸으니 그 종이도 거룩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감실은 하느님나라를 뜻하고 종이는 우리들입니다. 물질은 아무 쓸모도 없지만 그 안에 하느님이 흡수되시면 그것이 영원한 것으로 변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체를 영함으로써 썩어버릴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마노펠로라고 하는 동네에는 베로니카의 수건으로 믿어지는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수건이 있습니다. 수건도 별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그 수건에 당신을 새겨 영원히 기억될 것이 되었습니다.

토리노 대성당에 있는 예수님의 수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그 수위에 당신 모습을 새겨 넣으신 것처럼 우리들 안에 당신의 모습을 새기셔서 영원히 기억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선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나도 누군가의 속으로 들어가 그도 성사가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 마음 안에 흡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 살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며칠 전 아침 방송에서 수단 톤즈의 아이들이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전쟁을 많이 겪으며 강해야 한다고 배워왔기에 잘 울지 않는데,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지금 어디에 사실까요? 물론 하늘나라에 사시기도 하지만 그들 마음 안에 사시기에 하늘나라에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그 분 때문에 살아나게 된 이와 가의 가족의 마음 안에 살고 계시고, 마더 데레사는 그 분 덕에 살게 된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 다미아노 성인은 문둥병자들의 마음 안에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의 마음 안에 기억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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