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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2 조회수827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Lk.12,20)

제1독서 에페소 2,1-10
복음 루카 12,13-21

커피전문점을 가면 메뉴에서 가장 인기 없는 커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스프레소’ 커피이지요. 요즘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얼마 전만 해도 이를 시키면 일하는 직원이 꼭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커피는 양도 적고요. 맛도 써요. 아시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인정하는 양도 적고 맛도 쓴 커피. 그런데도 메뉴에는 빠지지 않고 꼭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에스프레소(Espresso)가 없으면 다른 커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노(Americano)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섞은 것이고, 카페라떼(Cafe latte)는 에스프레소에 스팀밀크를 넣은 것입니다. 또한 카푸치노(Cappuccino)는 에스프레소에 우유거품과 계핏가루를 섞은 것이며, 카페모카(Cafe Mocha)는 에스프레소에 스팀밀크 그리고 초코시럽을 넣은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커피의 맛과 향을 내는 기본은 에스프레소 커피인 것입니다. 에스프레소 없이는 어떤 커피도 만들 수 없는 것이지요.

에스프레소가 이렇게 중요하기에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이를 좋아하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 가장 근본이고 없어서는 안 될 주님의 계명이지만, 지금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한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스프레소 없이 어떤 커피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계명 역시 지금 선택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로 가고 싶어 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공정한 재산분배를 청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재산분배를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의의 차원에서 크게 어긋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정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굳이 이것들을 통해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대신 정말로 중요한 그래서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재물을 통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요. 주님께서 강조하여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맛도 쓰고 양도 적지만 없어서는 안 될 에스프레소 커피. 주님의 사랑 역시 때로는 내게 걸림돌처럼 보여서 피하고 싶지만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남의 귀중함을 아는 자는 헤어짐의 소중함도 안다(아바 이반).


어제는 신공항 성당을 다녀왔습니다.



혈액형 성격론

혈액형을 가지고 사람의 성격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이 구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A형은 소세지.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 같다.’

B형은 오이지.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 같다.’

O형은 단무지.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같다.’

AB형은 지지지. ‘지랄 같고 지랄 같고 지랄 같고.’

이렇게 사람의 성격을 아주 단순하게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맞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O형인데, 저 그렇게 단순하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지랄 맞은 것 같기는 하지만). 이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설명해 놓았을 뿐, 이를 따르고 받아들이면 결국 나를 바보로 만드는 역기능을 할 뿐입니다.

다양한 사람의 성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의 기준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요.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그의 다양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다양함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크신 하느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이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사람은 이 조그마한 틀에 하느님도 맞추려고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하느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모든 이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넓은 마음. 그래야 이 넓은 마음에 그 크신 주님을 담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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