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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불과 칼은 성령님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4 조회수820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12년 나해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복음: 루카 12,49-53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렘브란트(Rembrandt) 작, (1640)


     < 불과 칼은 성령님 >

       박근혜 대선후보가 대선후보로 당선된 후 야권의 상징적인 장소를 방문했다가 혼이 나며 돌아온 장소가 있는데 바로 전태일의 동상이 새겨진 분신장소입니다. 잠시 전태일 열사로 불리는 사람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지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하며 집 살림에 보탬이 됩니다.

태일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태일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3천원으로 대폭 올랐습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1966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지 1년여 동안 태일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처음 그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 평화시장.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나이 어린 여공,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것은 바로 태일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태일은 어렴풋이나마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월급은 거의 평상 임금 정도에 불과한 것이 공장 주인의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열 두세 살의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의 가슴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일방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 어린 여공들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늘에서 그늘로 전전했던 태일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태일은 자신이 놓인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평화시장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내부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자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최저임금과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며 분신합니다. 전태일이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힘차게 불타올라 70년대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동일방직,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출처: http://kin.naver.com/browse/db...]

 

물론 분신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 질러 수많은 노동자들의 비참함을 대변하였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기 위한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불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사실 성령 강림 때 그 불이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사도들의 집단에 붙여졌고 그것이 교회의 공식적인 출발이 됩니다. 또 베드로의 성령에 찬 설교를 듣고는 이내 그 불이 수천 명에게 붙게 되고 바로 세례를 받고 됩니다. 그들은 이제 성령의 불로 세상과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불이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는 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받은 이들은 이제 세상과 갈라지게 됩니다. 불이 붙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거나 끝까지 거부하여 세상에 남거나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아니라 칼과 분열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께서 잉태하신 후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고 그 태중의 아들이 기뻐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모님을 불타게 한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앞길을 닦아줄 태중의 요한에게까지도 성령의 불을 옮겨 붙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엘리사벳을 찾아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는 않지만 마리아를 통해, 즉 교회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불의 세례를 줍니다.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하는 것이 우리 안에 성령의 불덩어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이 붙은 누구나 이제 다른 이에게 불을 붙여줘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내게 붙여진 성령을 불을 전해 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불과 칼의 특성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불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자세는 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특성은 불과 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불과 칼을 주시기 위해 죽음과 부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의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을 짜내기 위해 마치 포도가 짓밟히듯 당신도 짓밟혀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 성령을 주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전해주기에 짓눌리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수난 공로로 교회 안에서 매일 새롭게 성령의 불을 붙이며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세상에 불을 놓아야 하는 작은 불쏘시개들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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