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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적인 눈을 떠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28 조회수790 추천수13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일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 10,46ㄴ-52



 
영적인 눈을 떠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 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습니다. 그 중에 가밀라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시각 장애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결혼주례를 하면서 ‘육신의 눈 보다 영적인 눈을 뜬 가밀라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육적인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 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 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렇지만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5,31-46)에서도 최후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시며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 다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인격을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확실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루뭉실하게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셔도 기도의 열매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말씀드릴 수 있도록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 저는 당신께서 계시는 집과 당신 영광이 깃드는 곳을 사랑합니다. 제 영혼을 죄인들과 함께, 제 생명을 살인자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편26,8-9).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눈을 떠서 본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선물을 주셔도 보지 못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눈을 떠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1고린1,18)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과 조폭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1.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
2.보스를 모신다. 하느님이나 주교님.
3. 관할 구역을 갖는다
4.식사 후 식비를 내지 않는다.
5. 반말을 즐겨한다.

 

다른점도 있대요.
1.조폭은 칼이라는 연장을 쓰지만 신부님은 십자가라는 연장을 쓴다.
2. 조폭은 몸에 문신을 새기지만 신부님은 십자가로 성호를 그어 새긴다.
3. 조폭은 피를 보지만 신부님은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
4. 조폭은 보스를 위해 희생하지만 신부님의 보스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는 비신자와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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