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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31 조회수917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but will not be strong enough.
(Lk.13,24)


제1독서 에페소 6,1-9
복음 루카 13,22-30

언젠가 15년의 법칙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5년은 지나야 그 분야에 전문가라고 말할 정도가 된다는 것이지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선수를 보세요. 대부분 15년 이상의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15년 동안을 죽기 살기로 매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매스컴을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발가락뼈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복사뼈가 묻힐 정도로 굳은살이 박여 있는 김연아의 피멍이 든 발, 너무나 많이 뛰어서 발가락의 발톱이 거의 죽어 있는 이봉주의 발, 축구선수로는 최악의 조건인 평발을 타고났지만 큰 노력으로 이를 극복한 박지성의 발 등등. 처참한 노력 없이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수들의 발입니다.

이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특별한 몇 사람이나 가능한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십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우리가 걸음마를 배울 때 2천 번도 더 넘어지고 일어섰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많이 넘어졌기에 어른이 되어 잘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 또한 영광의 그 길이 절대로 불가능한 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이 넘어지고 일어섰기 때문에 작고 좁은 길처럼 보이는 나의 길 안에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작고 좁은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래서 자신은 할 수 없음을 스스로 확신하면서 넓고 편한 길만을 선택하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넓고 편한 길에서 영광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단지 순간의 만족만을 가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또 하나의 진리를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넓고 편한 길이 아닌,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좁고 힘든 길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그 순간에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로 어렵겠지만, 결국은 큰 기쁨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좁고 힘든 길은 바로 주님께서도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자신의 희생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랑의 길입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부족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먼저 줄 수 있는 사랑은 정말로 좁고 힘든 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길. 정말로 좁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큰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따라서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 길을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 길은 남들이 다 걸어간 다음 내가 걷는 길이 아니라, 바로 내가 먼저 앞서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세월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어 주지요. 비록 지금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뿐이에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인천교구 전례꽃꽂이 작품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성소국 수녀님 작품.



고통의 끝은

우리들은 고통의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즉, 고통 없이 살기를 원하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것이 기억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당나귀가 항상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길을 다니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 비참한 삶을 끝내겠다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그러나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목숨을 끊은 당나귀는 이제 더 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더 큰 고통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당나귀가 죽자 사람들은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이 북을 치면서 기쁨의 축제를 열더라는 것입니다. 죽은 당나귀가 과연 이제 고통을 끊고 기뻐했을까요?

몸이 죽는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슬퍼하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을 것 같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여주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또 하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나를 만들어 이 땅에 보내주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는 것이지요.

몸이 죽는다고 고통이 끝난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마십시오. 이 고통을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고통을 껴안으며 넘어서려 할 때 비로소 그 끝을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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