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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낳으셨을까?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31 조회수378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7)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히브 5,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맏아드님을 저 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히브 1,5-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가?

하느님은 예수님을 왜  낳으셨다고 하시는가?

그럼 어떻게 낳으셨을까?

그럼 우리들도 하느님께서 낳으셨나?

 

성경의 어느 대목을 묵상하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이 저의 묵상이었습니다.

어느날 저 나름대로 요한 복음을 묵상하며 답을 얻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요한복음의 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어떤 그림이 보일 것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는데 어떻게 계셨는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계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저는 이 함께를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하느님을 의인화 해서 한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입으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사람안에 아직 말(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대로 하느님 안에 말씀(성자)이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성령과 함께 한 몸으로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니까요.

바로 이 모습이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삼위가 일체로 계신

모습이라고 묵상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창세기에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는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삼위가 함께 계셨는데 이제 하느님(성부)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위가 한 분으로 함께 계셨는데 성부께서 입을 여시자 말씀이 나오셨습니다.

말씀이 나오셔서 그 말씀대로 빛이 생겼습니다.

 

이 상태를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한처음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입을 여시어 말씀을 하시자

말씀(성자)이 하느님(성부)의 몸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물론 성령과 함께 나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므로 분리될 수 없는

영이십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성부)께서 당신 말씀(아드님)을 세상에 내놓으시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계신 말씀(성자)이

세상에 나오신 모습이므로  낳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묵상하였습니다.

 

인간도 자신의 몸에 아기를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낳습니다.

하느님(성부)께서도 당신 안에 품고 계시던 말씀(성자)이 나오셨기에

낳으셨다고 하시는 것으로 묵상하였습니다. 말씀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시기에 외아드님이라고 하신 것이라고 묵상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는데 우리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자녀가 되는가?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손으로 빚은 피조물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또 창세기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손수 빚으셔서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창세 2,7)

 

예수님(말씀)께서는 하느님(성부)께서 낳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이랬던 인간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과 우리를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12,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4-15)

 

예수님께서 벗이며 친구라 불러 주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1-15)

 

구약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벗이며 친구라 하시며 당신

자녀라 부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말씀이시며 아드님이신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묵상해 보면서 느낀 점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자가 되신 사건만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하면 조금 어렵다는 사실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을 통하여 사람이 되시기 전인 한처음에 말씀(성자)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상황을 먼저 묵상하면 도움이 되었습니다.

 

말씀(성자)은 하느님(성부)과 함께 계시다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말씀으로 세상에 나오셔서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속 하느님과

함께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가 성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리아의

태중(강생)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되신 예수님(성자)를 통하여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니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요한복음 1장을 묵상하며

한처음에 말씀(성자)이 하느님(성부)과 함께 계신 모습을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본래 한 분이셨다고 이해하면 쉬운데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니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미 세 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를

한 분이라고 이해하려니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삼위일체를 알아들을 수는 없을까? 하고

묵상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처음에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분이 되셨을까요?

사랑하면 나누게 되는 신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넘쳐서 한 분이 세 분으로 쪼개지셨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에 성체성사를 통해 그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몸을 쪼개시고 계심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통하여 왜 하느님께서  세 분의 위격으로 나뉘셨는지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는 족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뿐입니다.

아멘. 알레루야!

 

그리고 한처음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5,17)

 

내가 살아 있고 우리가 살아 있고 세상이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멈추시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아멘.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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