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 금요일 위령의 날 지혜4,7-15 로마6,3-9 마태25,1-13

묘비명(墓碑銘)

-죽음에 대한 묵상-

11월 위령성월은 죽음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많이 묵상하는 달입니다.

11.1일 어제 모든 성인들(all saints) 대축일에 이어

11.2일 오늘은 모든 연옥영혼(all souls)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죽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모르는 게 죽음입니다.

가장 분명하면서 확실한, 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까맣게 잊고 지내는 죽음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우리 삶이요 늘 곁에 있는 죽음입니다.

과연 준비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지혜로운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가장 힘들고 중요한 게 잘 늙어가다 잘 죽는 것입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 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지혜4,8-9).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는 삶의 질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했고,

우리는 매일 하루를 마감하는 끝기도 때마다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바칩니다.

죽음을 묵상할 때 온갖 환상의 어둠은 말끔히 걷힙니다.

죽음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과 앎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깨어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편 중 마음에 와 닿은 구절입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하느님이 그의 구원이신 자, 그의 희망, 하느님이신 자는 복되도다.”

위 시편들 바로 하느님이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을 그리워하여 저절로 바치는 찬미요,

찬미와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요 깨어있는 삶입니다.

생사를 넘어 영원한 삶이요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런 이들 위에는 죽음도 군림하지 못합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장만하여 늦게 도착했을 때

문은 닫혀 있었고 이들에 대한 주님의 이 말씀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았는데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삶이

바로 내 영혼 등잔에 기름을 마련하는 것이요,

비축되는 선행의 기름과 더불어 주님과 깊어지는 돈독한 앎의 관계입니다.


바로 슬기로운 처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어진 책임에 충실하며 깨어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죽음 준비입니다.


매일 제 시간에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미사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주님이 결정적으로 오시는 날은 바로 죽음의 날입니다.

죽음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여 묘비명의 묵상을 권합니다.

천주교 묘지를 방문할 때도 제가 우선 확인하는 것도 묘비명입니다.

예전 피정 지도 때도 각자 묘비명을 써보고 묵상하라 한 적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오늘 화답송 후렴은 예전에 어느 분에 써드린 묘비명입니다.

묘비명은 바로 좌우명이 되고 늘 영혼을 깨어있게 할 것입니다.

젤뚜르다 성녀는 1302.11.16일 임종 시

‘아! 신랑이 오신다.’ 환호하며 선종했다 합니다.

아마 성녀의 평생 좌우명은 오늘 복음의

‘신랑이 오신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자.’ 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늘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살았던 성녀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매일 깨어 바치는 미사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