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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일/첫째가는 계명/조 욱현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3 조회수475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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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 12,28-34......원 근식 엮음

첫째가는 계명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가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 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고 하시고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시켜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행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이 일은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시게 될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름을 말해준다”


-수원교구 조 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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