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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고통스러워도 낳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3 조회수859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12년 나해 연중 제31주일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 고통스러워도 낳는 이유 >

       이 이야기는 구 러시아의 정복국이었고 지금은 독립국인 키르기즈스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일화입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츄안츄안 부족은 용의주도하면서 잔인한 초원의 지배자였습니다. 나중에는 후세 사람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신의 저주를 받아서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포로를 잡으면 혹독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일명 만꾸르트라는 노예를 만들어냅니다. 만꾸르트는 인간 껍데기라는 뜻으로 그들의 기억도, 감정도 다 사라져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와 같은 노예를 의미합니다.

전쟁에 져서 츄안츄안 부족의 만꾸르트가 되어버린 졸라만과 그의 기억을 돌려주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의 어머니 나이만 아나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졸라만이라는 아들을 키우는 젊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졸라만은 아버지를 닮아 활을 잘 쏘는 명궁이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인 졸라만,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홀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었는데 어느 날, 그 동네에 잔인한 초원의 지배자 츄안츄안 부족이 쳐들어 왔습니다.

결국 졸라만도 또, 동네 사람들도 그들에게 사로잡혀 가고 말았습니다.

슬퍼하던 어머니,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을 거라는 일만의 희망을 갖고, 아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무서운 츄안츄안족에게 찾아가는 그 여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애틋한 마음이 여인으로서 가질 수 없는 마음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주막에서 츄안츄안족의 노예에 대한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츄안츄안족은 노예를 잡으면 암낙타의 젖가슴을 잘라 노예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리고 두 손을 묶어 햇빛아래 두면, 낙타껍질이 줄어들면서 머리를 조여 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됩니다. 혹여 그 고통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고, 바보가 되어 일명 만꾸르트, 인간 껍데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만꾸르트는 츄안츄안의 노예가 되어 그들이 하라는 대로 그대로 하게 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낙타 껍질을 씌운다 하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말을 잘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하루가 백년보다 더 길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졸라만의 엄마는 만꾸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희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헤맨 끝에 결국 만꾸르트가 되어 양을 치고 있는 아들 졸라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졸라만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졸라만!! 난 네 엄마야. 졸라만 네 아빠는 ~, 난 너의 엄마야 졸라만!! 졸라만~”

“ .....” 그러나 졸라만은 전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졸라만, 난 네 엄마야. 나를 기억해봐.”

“ ....”

그 때 츄안츄안족이 나타납니다.

졸라만! 엄마는 갔다가 또 올게. 졸라만!! 엄마 또 올게.”

졸라만에게 츄안츄안족이 와서 말합니다.

저 여자가 뭐라고 했지?”

내 엄마랍니다.”

아니 저 여잔 네 엄마가 아니야. 너를 괴롭힐 거야. 너를 더 힘들게 할 거야.”

싫어!! 흑흑흑 흑흑흑이렇게 두려워하는 졸라만에게 저 여자가 또 너를 찾아오면 이 활로 쏘는 거야. 알았지?”

네 알겠어요.”

얼마 후 엄마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졸라만!! 졸라만!! 어디 있니? 졸라만, 엄마야. 졸라만 엄마야. 어딨니?”

졸라만은 멀리서 엄마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졸라만 안 돼!! 안 돼!! 졸라만 엄마야. 졸라만~~”

이미 활은 졸라만의 활시위에서 떠났고 엄마의 목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졸라만! 졸라만! 안 돼. 나는 네 엄마고 넌 내 아들 ... 이야. 조 졸라만 ...”

졸라만은 죽어가는 엄마를 뒤로 한 채 뒤돌아 가버립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죽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는 당대 사람들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모르는 계명의 본질을 망각한 상태를 말해줍니다. 계명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규정해 놓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당대에만 해도 613개의 규정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행동방침들이 주인이 되어서 이 규정들이 나오게 된 참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그 첫 계명은 하느님을 온 자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도 동의합니다. 하느님은 한분뿐이시라 그분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계명이 존재하는 궁극적 목적이 결국 하느님나라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의 본질은 인간에게 죄로 잃어버렸던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표지판과 같은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다다르게 해주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대학교 다니는 조카가 잠깐 왔었습니다. 나름대로 주일미사는 빠지고 있지 않지만 단 한 번도 성체 앞에 앉아서 그 분과 일대일로 대화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저주를 받아 사라져버린 한 부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부족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습니다. 그 방법은 고통이라는 것을 맛보게 해놓고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두려움이란 사슬로 묶어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들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한 것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율법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처럼, 졸라만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졸라만은 고통을 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줄 것 같은 어머니를 활로 쏘아 죽입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 줄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저 껍데기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본인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행복인줄 알겠지만 행복은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행복 때문에 모든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 낳는 고통 때문에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아이 낳는 행복 때문에 그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참 행복인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맺음이 관계 맺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보다 더 큰 행복을 준다는 것을 아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졸라만은 자신의 어머니를 망각하고 인간 껍데기로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 앞에서 더 깊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하느님을 활로 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신학교로 불러주셨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두려워서 그분이 멀리서 부를 때 계속 활로 쏘며 더 이상은 가까워지려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인간이 왜 하늘나라의 행복을 잃었을까요?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쪽 눈만 지닌 어머니 이야기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쪽 눈만 지닌 어머니를 창피해 해서 나중에 소식도 끊고 살다가 결국 돌아가신 어머니 손에서 발견된 편지에 자신이 한쪽 눈이 다쳤을 때 어머니가 자신에게 눈을 넣어준 것을 알고는 뉘우치며 매우 슬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평생 어머니가 자신에게 눈을 넣어주셨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성체 앞에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 전부를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눈을 나를 위해 눈을 빼주었을 것도 믿지 못하는데, 어찌 하느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그분과의 관계를 갖지 않도록 자신들이 주는 죄의 쾌락만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당기고 있는 활을 잠시 내려놓고 어떤 분이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나를 찾아왔고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매달려 나를 바라보며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하시는지 생각해보고 우리의 잊혀진 기억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에게 다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죽임을 당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세상 모든 것을 잃는 고통보다 큽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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