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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을 사랑하라 - '12.11.4.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4 조회수32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2.11.4 연중 제31주일 신명6,2-6 히브7,23-28 마르12,28ㄱㄷ-34

 

 

 

 

 



주님을 사랑하라

 

 

 

 

 


저희 수도원의 장관 중 하나는 일출(日出) 장면입니다.

동쪽 산봉우리 위에 황홀하게 두둥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

저절로 탄성을 발하게 됩니다.


여기오던 1988년도나 지금이나

언제나 한 결 같이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참 좋다. 새롭다. 아름답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

 

  아침마다 떠오르는 하느님/아침마다 떠오르는 나”

 

 
아침마다 떠올라 온 누리를 환히 밝히는 태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상징합니다.

태양처럼, 하느님처럼 떠올라

하루를 또 새롭게 시작하는 수도승의 삶입니다.

햇빛 사랑에 붉게 타오르는 가을 단풍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에 붉게 타오르는 성인들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얼마 전 발견한 반가운 말마디입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의 말로

얼마 전 암 투병 중에도

낙천적으로 명랑하게 살아가는 어느 젊은 자매에게 준 말입니다.


반색을 하며 ‘나에게 딱 맞는 말’이라 하며 기뻐했습니다.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힘껏 사랑하며 하루하루 살아냈던

옛 사막의 수도승들이었습니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이런 깨달음이 일일일생의 정신으로

하루하루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하루를 잘 사는 길은 이일뿐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살아갈 때는 하루하루가 허무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는 하루하루가 충만입니다.


신명기의 모세에 이어

예수님도 율법학자의 물음에 하느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하느님 사랑에 이웃 사랑을 붙여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의 열쇠입니다.

기분 사랑, 감정 사랑이 아니라

전존재를 투신하는 갈림 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삶의 모두요 가장 큰 일입니다.

 

이래야 우리의 온갖 삶과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미사 드리고, 일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목감기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자세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말씀을 깊이 깨달았던 적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직접적 표현은

미사와 성무일도 때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때

계속되는 ‘주님을 찬미하라’는 말이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처럼 들렸고

하여 강론 제목도 ‘주님을 사랑하라’고 정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듯 찬미기도를 바칠 때 풍성한 은혜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찬미에 초대하여

하느님 사랑으로 안내하는 찬미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찬미가 하느님 사랑을 닮아

우리의 마음을 넓고 깊게 합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하느님 사랑은

아래의 이웃 사랑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아감으로

‘사람 이웃’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 이웃에게까지 우리의 사랑이 확장됩니다.

 


이런 사랑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이요,

좋고 싫고의 문제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 긍정의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는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갑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맹목(盲目)이고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空虛)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 있어 순수하고 눈 밝은 이웃 사랑이요,

이웃 사랑 있어 하느님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

 

 

 


어제 복음 나눌 때 어느 수도형제의

하느님 사랑은 쉬운데 이웃 사랑은 참 어렵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어려움이

‘함께 사는 일’이요 ‘서로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수도공동생활 중 공동기도가 그리 많은 것입니다.

하루 일곱 번의 공동기도가 그 만큼 함께 사는 일의 어려움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맞춰갈 때

저절로 서로 간에도 보완 협력의 사랑 관계가 형성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여 함께 바치는 공동기도라는

‘하느님의 일’이 ‘함께 사는 일’의 어려움을 덜어 줍니다.


하느님 사랑이 바로 이웃 사랑의 뿌리요 토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평생 누구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주님이십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뚜렷이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위로 하느님의 사랑과 소통을 상징하는 수직선에

옆으로 이웃 사랑과 소통을 상징하는 수평선이 만나는 지점에

십자가의 주님이 현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했습니다.”(히브7,25-26ㄱ).

 


히브리서 말씀대로

우리 공동체 한가운데서, 미사성제 안에서

대사제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깊어지는

하느님 사랑이요 이웃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율법학자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행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고 슬기롭게 대답하자

예수님은 아주 고무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바로 거기가 축복 가득한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신명기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라는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장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 모두 힘껏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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