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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5 조회수820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When you hold a banquet,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the blind;
blessed indeed will you be
because of their inability to repay you.
For you will be repaid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Lk.14,13-14)

제1독서 필리피 2,1-4
복음 루카 14,12-14

얼마 전, 교구청 마당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어디에서 사는지 또 누가 키우는지 모르는 조그마한 고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께서 이 고양이가 예쁘다고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겠다면서 사제관 주방으로 힘차게 뛰어가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바로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저렇게 먹을 것을 주면 이곳 교구청 마당에 이 고양이가 계속 나타나지 않을까? 고양이 소리가 밤에 들으면 애기 울음소리 같던데……. 혹시 밤마다 저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아냐? 저 신부가 지금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데 같이 있던 한 신부가 “내일 비 온다고 하지요?”라는 말을 꺼냅니다. 순간 걱정이 됩니다. 내일 밖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비가 오면 상당히 힘들어지거든요.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운 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비 올까봐 걱정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과연 맞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까지도 신경을 쓰시는 주님, 이 주님을 닮겠다고 말하면서도 생명에 대해서 나의 불편함만을 떠올리며 소홀히 하고 있었던 저였던 것이지요.

생명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을까요? 나의 생명만 소중하고, 다른 이의 생명은 무시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우리들의 모습 역시 부끄러운 또 한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이 생명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함부로 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초대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고 하시지요. 대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초대하라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들에게 소홀히 할 때가 많은 우리들이었습니다. 기왕이면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 또는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가 받을 상을 직접 하늘에서 마련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도록 주님께서 하신 사랑의 초대를 우리 역시 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기억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고 배제되지 않도록…….

 

꿈을 날짜와 함께 적으면 목표가 되고, 목표를 나누면 계획이 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된다(그레그 S.레이드).



신학교를 지원할 수험생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도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부탁해서 간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도로 상태가 좋지가 않은 것입니다. 여유 있게 출발을 한다고 했는데 도로가 너무 막혀서 강의 시작 직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착을 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당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일정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서 일정을 확인했지만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를 부탁한 분께 전화를 했더니, 강의 장소가 성당이 아니라 교육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이 교육관 역시 미로 같은 성당 구조 덕분에 빨리 찾지 못해서 원래하기로 했던 강의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었습니다. 특히 어디에서 강의를 한다는 안내 표지 하나 없는 주최 측에 대한 불만이 생겼지요.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 이 교육관 강당에 계신 분은 20명도 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본당 자원의 교육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본당의 기도 모임이 있는데, 어디에선가 제 강의를 들었던 한 자매님의 추천으로 저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이라고 해서, 당연히 본당 전체 강의인 줄을 알았는데 이러한 소규모의 모임이라는 사실에 맥이 빠지고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화를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0명도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그래도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고자 어렵게 오신 분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되었지요. 또 만약 화가 난다고 그리고 숫자가 적다고 대충대충 강의를 했다가는 그렇게 했던 제 자신에 대해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화가 나고 미움의 감정이 생길 상황은 우리에게 자주 일어났었습니다. 문제는 그 뒤의 일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또 다른 화와 미움으로 확대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을 나에게서 멈추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만들 것인지는 바로 내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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