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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토마스 그린 신부님의 하느님 체험하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5 조회수606 추천수3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토마스 그린 신부님의 하느님 체험하기

 

 

2부 앎에서 사랑하기로

 

하느님의 실재: 관상기도를 위한 준비

예수회의 월리엄 콘리 신부는 영적 지도의 목적은 관상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지도자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역활은

관상기도를 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콘리  신부가 의미하는 관상기도는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거나

환시를 보거나 신비스런 소리를 듣거나 주변에 장미가 없는데도

장미 향기를 맡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주장하듯 진정한 관상은 초자연적인 현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콘리 신부가 말하는 관상은 예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실재가 되는 순간, 하느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실재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영적지도는 실제로 관상 전과 관상 후의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관상 전, 즉 하느님이 피정자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기 이전 단계의 사람을 영적지도하는 지도자의 역활은,

주님을 가리키던 세례자 요한처럼 지도를 받는 자가 어디쯤 있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든가 이미

만났다거나 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피정자가 일단 관상기도가 되면, 즉 하느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시게 되면, 지도자의 역활은 매우 달라지게 된다.

체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체험의 해설자가 되어야 한다.

거짓 소리가 있기 때문에 해설자가 필요하다.

 

하느님인 듯이 소리 내는 악마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려는

자도 있다. 사도 바오로가 자주 강조하듯이 선을 가장한 악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 전과 관상 후의 영적지도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종종 아주 로멘틱한 사람들은 그들 환상 속에서 자신만의 하느님을

만들어내고 만나지도 않은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어 낸 신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든 더 현실적인 사랑을 말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위한 힘든 작업을 해서 확고해지고 우리 발이

굳건히 땅을 디디고 우리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르면 내가 아는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 자신을 드러낸다.

 

흥미롭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즉 하느님이 개인적으로 실재하실

때 기도는 더 수동적이며 다소 덜 능동적이 된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실제로 존재하게 되고 내게 능동적이며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각본을 쓰고 내가 연극을 창조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시작과 끝 그리고

주인공을 통제하는 나는 전적으로 능동적이고 조종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내게 실재가 되면 피할 수 없이

나는 더 수용적이 되는데 내 친구의 기분 상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일단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시게 되면 우리는 더

수용적으로 조종을 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가 성장하면

하느님은 '말하기에서 듣기'의 체험으로 점차 우리를 옮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감성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능동적이다. 이 기도에는

한편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의 수용성 또는 수동성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감정적 기도에 자연히 있는 능동성도 있다.

 

감정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다시 한 번 만남을 가지려고

체험의 분위기를 만들거나 결심을 굳게 하고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행위를 한다.

 

하느님께 내어드리기를 배우기

 

사람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 더욱 의존적으로 됨에도 여러 면에서

아직 상당히 서로 조종하려 든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이

근본적으로 욕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성으로 체험할 때 여지없이 하느님을 조종하려

들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감성이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성에 관해 직시하여야 한다. 우리의 감성은 자주 조작될

수 있고 이러한 일는 실재하는 그분, 우리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 할 때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 이상,

아니 사실은 그만큼도 하느님을 지배할 수가 없다.

 

이 단계에서 주님은 좌지우지하고 조작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점차로

없애신다. 감성적 기도 단계에서까지도 상황을 조정하려는 우리의

시도, 우리의 느낌대로 하려는 시도, 감정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그치게

하셔서 점차로 좌절하게 된다.

 

사물을 조종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점차로 그치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키기

시작하는 주님의 면밀한 계획이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기도가 덜 감성적인 단계에서 잠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기도가

더 감성적인 단계에서 잠심한다는 것은 기도의 개념과 틀, 즉 수련

초기에 배웠던 공식적인 틀에 의해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인데 성숙의

둘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고요하지 않게 만드는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초기에 배운 기도대로 하려고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감성적 기도단계에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주님이 자유롭게 오고 가심을 방해하는 모든 기술과 모든 틀과

모든 개념들을 놓아 버리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커다란 자유를

체험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면 관계 자체는 그에 맞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미 조작되고 예상된 구조로 관계를 조정할 수는 없다. 어떤 관계든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고요하게 된다는 것은 그 상황에

적절히 맞도록 기도의 틀과 기술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기대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

 

어떤 때는 기도의 틀을 정말 무시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초보자일 때 배운 기도의 형식을 무시한다면 어쩌면 나는 주제 넘고

성의가 부족한 것이고 헤멜지도 모른다.

 

반면에 내가 만약 형식에 매달리면 하느님이 관장하시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도의 처음 10분 내지 15분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잠심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이미 익숙한 기도

방법에 따라 기도하거나 성찰하면 될 것이다.

 

하느님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관장하실 기회를 먼저 드렸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주도권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방해하거나 제한하지 않도록 흘러가게 맡기는

것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성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정화는 더욱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정화는 실제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써 변화의 단계인 셋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정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는 단계에서처럼, 정화는 더욱더 하느님의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

 

번역: 최혜정 제노비아/ 애틀란타 한국순교자성당

 

예수회 후원회 이냐시오의 벗들 2012년 10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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