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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보십시오!(ECCE!)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0 조회수6,457 추천수0

[전례, 그 능동적 참여] 보십시오!(ECCE!)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대천사 가브리엘과 나자렛 고을 처녀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천사의 “보라,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는 탄생 예고 선언과 그에 대한 처녀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대답에는 공통된 문장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라! 보십시오!라는 ECCE! 라는 단어가 두 문장의 서두를 장식하며 공통되게 상용되어 수미쌍관을 이룬다. 자칫 이 단어 ‘보라’와 ‘보십시오’가 감탄사일 뿐 문어체의 허사라고 인식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엄청난 신앙고백의 대화임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구원의 역사적 장면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에서 쓰인 신앙고백문을 나타내는 중심단어이며 미사경문에도 도입된 단어이다.

 

성경에서 ‘보라! 보십시오!’라는 단어는 우리가 미사 영성체 전에 사제가 성체를 들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단어이다.

 

독특하게 이 단어는 ‘보다’의 명령어 형식을 취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무엇을 꼭 잡아라. 둘째는 집중해라. 셋째는 동참하라!라는 뜻이다.

 

예수님 잉태 전 성모님과 천사 가브리엘의 만남에서 대화를 살펴보면 엄청난 감동이 일어난다. 루카복음 1장을 살펴보면 우선 성모님은 처녀의 임신이라는 통보를 듣고 몹시 놀라워했다고 한다. 큰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마치 태풍이 닥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태풍을 잠잠하게 만든다.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그녀는 그 엄청난 천사의 아룀에 의한 충격을 완화하고 듣는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닥친 태풍의 경로를 바꾸거나 감소하는 인간적 궁리나 책임회피가 아닌 정면승부를 한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도록 어떻게 안 될까? 그런 생각 말이다.

 

그 정면승부란 이해되지 않지만 듣고 간직하기! 이어 천사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한다. 흥미 있게도 보통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선포를 한 다음 이를 통해 마리아를 진정시키고 나서 그리고 구세주 탄생 예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느님은 한 처녀에게 닥칠 엄청난 사건을 먼저 통보하게 하고 그녀의 대응을 보셨다. 그녀는 겸손과 신중함이라는 신앙의 위대한 그릇으로 그것을 담아낸다. 뜨거운 음식을 담는 그릇은 확실히 다르다. 그녀는 과연 엄청난 뜨거움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었다. 그녀는 천사의 아룀에 대해 보다 밀도 있고 전향적이며 주도적인 대답을 한다.

 

“보십시오!”

 

이 말속에는 엄청난 자기 투신과 신앙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처녀 마리아가 이어 말한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는 마치 교회전례 화답송의 계와 응과 같다. 혹은 치고받는 신들린 사물놀이의 가락과 같다. 결코 시골처녀의 소곤거리는 수줍음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당당함이 있다.

 

오히려 대천사를 상대하며 “보십시오!”라는 자신감을 표현한다.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상대한 다윗의 이야기보다 대단하다. 그녀는 용기 있는 신앙의 순명의지를 통해 천사의 말처럼 이미 하느님의 능력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입은 것이다.

 

 

신앙의 결단과 실천으로 하느님 바라보는 눈 갖게 돼

 

주저 없는 응답! 즉시 응답함으로써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소유한 사람이 되며 그 말씀에 집중한다.

 

그녀가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보게 되고 만나게 되며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어느 시인은 “보려는 자만이 보인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예수 탄생 예고에는 천사와의 짧은 대화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요소들이 들어있다. 처음엔 주눅들 수밖에 없는 천사의 아룀에 어느새 대천사가 주눅 들 정도의 응답이 나왔다.

 

“보십시오!”

 

성서 안에서 보라! 혹은 보았다! 보시오! 라는 말은 정말 중요한 단어이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지고 깨닫게 된 순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교감, 나아가 통감의 순간에서야 나오는 동사이자 감탄사이다.

 

‘보다!’라는 동사는 신앙의 눈이 뜨였을 때 터진 복주머니이다. 안드레아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한 안드레아의 증언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았소!”

 

로마병사는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는 순간! “보라! 이 사람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은 정보의 호수이지만 또한 가짜 정보의 오염도 심각하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의 나침반임을 깨닫고 성모님처럼 “보십시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보십시오!”는 수동적 신앙이 아닌 능동적 신앙의 고백행위인 것이다.

묵주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하고, 레지오의 상훈에서 단원들은 마리아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섬기듯이 봉사할 것을 명하고 있다. 즉 그냥 하는 기도가 아닌 보고 기도하는 관상기도! 그냥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섬기듯이 할 것!

 

이렇듯 신앙의 결단과 실천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마르타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9월호, 허윤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정부교구 광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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