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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두산 천지 옆에서 미사를 지내던 그 새벽의 기원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7 조회수394 추천수0 반대(0) 신고
             백두산 천지 옆에서 미사를 지내던 그 새벽의 기원
                     고(故) 방윤석 신부님을 추모하며






11월은 가톨릭교회의 ‘위령의 달’이다. 세상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많이 기도하는 달이다. ‘위령의 날’인 2일에는 세계의 모든 성당과 교회묘지에서 세상 떠난 영혼들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며, 모든 사제들은 이 날 미사를 세 번 지낸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11월 한 달 동안 한 번 이상 ‘위령미사’를 봉헌하기도 하고, 묘소를 찾아 연도를 바치기도 한다.                                                          
                                                                
지난 8월 16일 62세 아까운 연세로 선종하신 방윤석 신부님을 추모하며 ‘위령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지난달 출간된 ‘대전가톨릭문학회’ 작품집 제19호에 방윤석 신부님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그 글을 11월 ‘위령의 달’을 지내며 인터넷 매체 독자 여러분께도 소개한다.



▲방윤석 신부님의 만돌린 연주 모습 / 2010년 10월 31일 저녁, 서산 석림동성당 주임이던 방윤석 신부는 석림동성당에서 제10회 ‘만돌린자선독주회’를 열었다.
ⓒ 지요하

8월 16일 오후 아내와 함께 공주 ‘수리치성지’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종 소식을 들었다. 방향을 바꿔 대전성모병원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대전으로 가는 동안, 또 ‘대전가톨릭문학회’ 담당사제이신 성거산성지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이 주례하시는 6시 위령미사에 참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내와 함께 방윤석 신부님과의 추억들을 많이 떠올렸다.

내가 방윤석 신부님을 처음 뵌 때는 방 신부님이 군종 복무를 마치고 청양성당 주임으로 가 계실 때였지만, 방 신부님과 구체적으로 인연의 정을 쌓게 된 것은 1994년 대전가톨릭문학회 창립 이후였다. 대전가톨릭문학회는 당시 교구 사목국장이셨던 유흥식 나자로 현 교구장 주교님이 당시 교구장이셨던 경갑룡 요셉 주교님의 특명에 따라 창립 주선을 하셨지만, 이듬해부터는 교구 홍보국장인 방윤석 신부님이 담당을 하셨다. 그때부터 방윤석 신부님은 10년 넘게 대전가톨릭문학회 담당사제로 일하셨다.

방 신부님은 교구 홍보국 산하에 대전가톨릭언론인회, 대전가톨릭사진작가회, 대전가톨릭마르코니회, 대전가톨릭운전기사회 등등 여러 개의 사도직단체들을 창립하여 담당사제로 일하시면서 해마다 여름에는 합동하계피정을, 가을에는 합동연수회 등을 여셨다.



▲백두산 천지 / 2003년 8월 12일 오후 우리 가족은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 천지를 보며 넋을 잃고 있는 내 딸아이(당시 고1)와 아들 녀석(당시 중1)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지요하

1996년 8월에는 금산군 부리면의 금강 지류인 적벽강변에서 1박 2일의 합동하계피정을 마련하셨다. 우리 부부는 당시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던 아이들도 데리고 그 행사에 참여했다. 방 신부님은 대전가톨릭문학회 부회장인 내가 가족과 함께 참여한 것을 매우 기뻐하셨다. 거듭 내게 감사를 표하고, 우리 가족 덕분에 교구 홍보국 산하 사도직단체들 합동하계피정 행사가 더욱 풍성하게 됐다는 말씀도 강변미사 때 공개적으로 하셨다. 신부님 덕에 우리 가족이 박수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태안에서 가져간 생오징어 한 상자를 데쳐 내놓고 모닥불 주위에 들러 앉아 강변에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주워 담으며 밤 깊도록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던 그 밤의 풍경은 내 가슴에 별빛 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방윤석 신부님의 기타와 만돌린 연주를 들으며 방 신부님의 음악 재능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2001년 8월에도 우리들은 방 신부님의 주선으로 또 한 번 적벽강을 찾았다. 그러나 적벽강은 이미 5년 전의 적벽강이 아니었다. 전라북도인 상류 쪽에 건설된 용담댐으로 말미암아 수량이 대폭 줄고 유속이 느려져서 강변은 그대로 벌판이 되어 있었고, 물속의 돌들에는 이끼가 덮여 미끄러워 걸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환경이 변한 것을 우리 모두 가슴아파했다.

그때도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참여했다. 또 그때는 텐트를 이용하지 않고 내 12인승 승합차에 모기장을 씌워놓고 차 안에서 잠을 잤다. 승합차를 통째로 감싼 모기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말로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대로 즐거웠지만 용담댐으로 말미암아 적벽강이 사라진 환경변화는 지금도 내 가슴에 아쉬움과 아픔으로 남아 있다.

방윤석 신부님과의 추억들을 떠올리자면 2003년의 백두산 여행이 압권이다. 그해 8월, 당시 대전평화방송 사장이셨던 방윤석 신부님이 합동하계피정을 백두산에서 갖자고 하셨다. 이름하여 ‘백두산 피정’이었다. 내 일생 초유의 이 뜻 깊은 행사에도 우리 가족 모두 참여했다. 당시 딸아이는 고1이었고, 아들 녀석은 중1이었다.

우리 네 가족을 포함하여 일행은 모두 18명이었다. 3박 4일의 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백두산을 오르는 일이었고 천지를 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백두산을 올랐고, 첫 번째 시도에서 천지를 보았다. 잰걸음으로 먼저 언덕을 오른 아들 녀석이 천지를 보며 “엄마, 아빠, 빨리 오세요. 너무 멋져요!”라고 외치던 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천지를 보며 크게 감격했던 우리는 다음날 새벽 또 백두산을 올랐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방윤석 신부님의 기발한 착상이었다. 신부님은 자신의 개인 비용으로 지프들을 불렀고, 미사 도구들을 준비했다.



▲백두산 천지 미사 / 2003년 8월 13일 새벽, ‘백두산 피정’에 참가한 우리 가족과 일행은 방윤석 신부님 주례로 천지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했다.
ⓒ 지요하

그날 새벽에도 우리는 천지를 보았다. 동쪽 망망한 수림 위에서 먼동이 터올 때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는 천지를 내려다보며 미사 준비를 했다. 적당한 자리에 제대(祭臺)로 사용하기 똑 좋은 네모진 판판한 돌이 있었다. 사제가 북한 쪽을 바라보는 자세로 서고 우리는 동쪽 하늘의 먼동을 등에 진 채로 미사를 지냈다. 손이 시릴 정도로 백두산 정상의 여름 새벽은 추웠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미사에 열중했다.

미사의 지향은 당연히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 기원’이었다. 미사 중의 ‘보편지향기도’ 시간에는 여러 사람이 ‘화살기도’를 했다. 백두산을 올라 천지를 보는 기쁨과 좋은 날씨를 만난 행운 속에서도 민족의 분단 현실을 더욱 깊이 체감하지 않을 수 없는 아픔을 고백했고, 평화 통일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새로이 깨닫도록 해주실 것과 참된 국민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하기도 했다.

미사를 마치고 천지와 작별을 고하고 백두산을 내려오면서 방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백두산 피정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또 옵시다. 다시 와서 천지 옆에서 민족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합시다. 그리고 언젠가는 중국 땅이 아닌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이 빨리 오도록 기도하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다시 꼭 백두산에 옵시다. ‘백두산 피정’,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모두 힘껏 박수를 쳤다. 다음에는 북한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오를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우리의 그 기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그 기원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방윤석 신부님은 이승을 떠나셨다.  



▲백두산 천지 앞에서 / 2003년 8월 12일 오후 우리 가족은 백두산 천지 앞에 섰다. 당시 중1이던 아들 녀석과 함께 감격을 나누며 포즈를 취했다.
ⓒ 지요하

방윤석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던 순간 우리 부부는 똑같이 백두산 천지 옆에서의 그날 새벽 풍경을 떠올렸다. 백두산 천지 옆에서 일출을 보며 미사를 지낸 사제는, 또 신자들은 어쩌면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방 신부님을 생각하면 그날의 백두산 풍경이 떠오르고, 그날 새벽의 우리의 간절한 기원이 다시금 가슴을 적신다. 방 신부님과 함께 했던 우리의 그 ‘백두산 기원’은 세상 끝 날까지 내 가슴에 살아 있을 것이다.

대전에서 장례미사를 지내고 돌아온 날 밤, 우리 부부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2003년 8월 ‘백두산 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내가 <오마이뉴스> 지면에 올렸던 두 개의 글을 찾아서 실로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가며>라는 글과 <백두산 천지에서 일출을 보며 미사를 지내다>라는 글이었다.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그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바로 어제인 듯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날의 그 시간이 너무도 그리워 뭔가가 뼈에 사무치는 듯했다. “언젠가는 중국 땅이 아닌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이 빨리 오도록 기도하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다시 꼭 백두산에 옵시다. ‘백두산 피정’,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하시던 방 신부님의 음성이 다시금 내 귓전에서 생생하게 들리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백두산 천지에 대한 그리움과 방윤석 신부님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나누며 거실의 ‘기도상’ 앞에 앉아 성호를 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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