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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아야 하는 이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11.11.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11 조회수404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11.11 연중 제32주일 열왕17,10-16 히브9,24-28 마르12,38-44

 

 

 

 

 



살아야 하는 이유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요즘 번역된,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에 눈길이 갑니다.


재일동포 교수(강 상중)가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고통과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 3.11일 동일본 대지진의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책입니다.

저자와의 인터뷰 대담 내용의 제목에 눈길이 갑니다.

 


“아들이 죽었다!

  2만 명이 사라졌다.

  살 이유가 있을까?

 

  -우울의 시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다-”

 

라는 제목입니다.

 


살 이유가 있을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삶의 의미를 잃고 상처에 우울증에 자살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대담자는 이 책을 읽고 달팽이를 연상했다 하며

다음과 같이 대담을 이어갑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생물적' 차원으로 내려가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책이 나온 사회가

  그만큼 절망적인 수준이라는 방증인 셈이라 안타깝게 느껴지는데요.

  저는 이것을 달팽이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커다란 미지의 세계를 앞에 둔 달팽이지요.

  하지만 달팽이는 앞이 안 보인다고 바로 스스로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거나 물기가 있으면 조금씩 촉수를 움직이거든요.”

 

 

 


마치 달팽이의 비유가

그대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불안한 오늘의 현실을

조심조심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적절한 비유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랐습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하느님이, 성인들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성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내 영혼아, 하느님을 찬양하라.

  알렐루야!”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 살아야 하는 이유의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도저히 생물적 차원을 넘어설 수 없고

잿빛 전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며 생명이며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결국 모두가 절망으로 죽음으로 어둠으로 귀결됩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

바로 살아야 하는 이유요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오늘 저는 독서와 복음의 가난하나 마음 넉넉한 과부의 모습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성인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입니다.

주님을 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갈 때

서서히 속화되어 망가져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주님께 지탄 받는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가 그러합니다.


주님을 잊어, 주님을 벗어났기에 세상 안에서 참 나를 잊고

하느님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 사람의 눈에 따라 살아갑니다.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깁니다.

완전히 외적인간의 전형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내적 아름다움과 품위는 전혀 감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과부는 하느님 안에서 살았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전혀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루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을 전부 봉헌합니다.

겉모습은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적 아름다움과 품위는 넘칩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내적 아름다움과 품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을 닮아 너그럽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습니다.

바로 사렙타의 과부가 그러합니다.

오늘 독서가 시작되기 전 주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사렙다 과부임이 분명합니다.

또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닮아 참 너그럽습니다.

전혀 인색하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엘리야의 요구가 점입가경입니다만

사렙타 과부는 군말 없이 엘리야 명령에 순종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응답했고 큰 축복을 받습니다.

 

너그럽고 자유롭기는 복음의 과부 역시 그 이상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는데

이 복음의 과부는 하느님만 섬겼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는 인색한 부자들과는 달리

하루 생활비 전부를 봉헌하는 과부입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마음만은 큰 부자요 자유인입니다.

이런 봉헌 또한 하느님 사랑의 전적 표현이요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너그럽고 자유로워질 수뿐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야 수수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 참으로 수수하고 소박한 본질적 삶입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

실상 자기를 위해,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외적 인간입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실재요,

자기도, 세상도 환상이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입니다.

이렇게 참 나를 잊고 환상 속에 살 때 저절로 허영과 교만의 삶이요

이런 이들에게 신앙은 액세서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앙과 삶이 하나일 때 비로소 수수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부자들이 참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천박하고 진심이 담긴 모습이 아닙니다.


반면 복음의 과부는 참 수수하고 소박해 보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허영과 교만의 환상은 걷혀 저절로 수수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돈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물질적 부가, 건강이 역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아무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성인이 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살아가십시오. 이래야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십시오. 이래야 너그럽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십시오. 이래야 수수하고 소박한 삶입니다.

 


바로 이게 살아야 하는 이유요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성인의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시며

이런 성인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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