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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12 조회수883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If your brother sins, rebuke him;
and if he repents, forgive him.
(Lk.1,3)


제1독서 티토 1,1-9
복음 루카 17,1-6

가장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사는 미국인의 96%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해 무신론자는 2%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50년 전의 조사와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50년 전만 해도 무신론자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지요. 50년 전과 비교할 때 엄청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 하느님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더 힘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게 되었고, 이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통해서만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더욱 더 잘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 하느님과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법칙들만을 쫓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 아침, 출근을 해서 사무실의 노트북 컴퓨터의 전원을 켜서 여러 가지 작업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갑작스런 만남이 있어서 급하게 외출을 다녀왔습니다. 노트북을 켜둔 채 말이지요. 그런데 외출을 다녀온 뒤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노트북의 전원에 꺼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켜니 배터리 부족 알람이 들어옵니다. 알고 보니 노트북 전원선이 플러그에서 뽑혀 있었고, ‘화면보호’ 기능을 꺼놓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전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외출 전에 작업했던 문서들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기계는 전원에 연결되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남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까지는 용서했지만 네 번 이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곤 번을 말씀하십니다. 딱 일곱 번까지만 용서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때,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용서에는 한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이 용서를 어떻게든 실천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은 복수를 꿈꾸며 용서라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가 전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듯이, 우리 역시 주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용서의 삶을 잊지 않고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정현종).



어제는 예비신학교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모임이 있었던 대건고.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지 말자
 

전에 어느 성당에서 스스로를 대단한 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뵌 적이 있지요.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또 어떤 분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님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그 분들에게 내려오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굳이 그분들의 몸을 이용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로 스스로 과대망상증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이 아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를 바꿀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해로운 습관과 행동을 극복할 완벽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일 수 없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안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놓으려는 잘못된 마음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스스로를 하느님인 척 그리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뜻이 항상 먼저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삶까지 통제하여, 결국 모든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뜻을 줄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는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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