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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17 조회수1,040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Will not God then secure the rights of his chosen ones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that justice is done for them speedily.
(Lk.18,7)


제1독서 3요한 5-8
복음 루카 18,1-8

어렸을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에 누군가가 “노래 한 번 해볼래?”하면 자신 있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춤 춰봐~~”라고 말하면 신나게 개다리 춤을 췄습니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마치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자신 있게 그렸습니다.

실제로 유치원을 방문했던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전원 즉각 속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춤을 출 줄 아는 사람,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물었을 때에도 유치원생들은 똑같이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질문을 대학생에게 했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을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감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감탄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서도 “와~ 개미다!!”라며 감탄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큰 것을 보고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강의를 나가서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무표정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피식’ 웃을 뿐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무슨 일에 적극적으로 어떻게 임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며, 그래서 감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이며, 자그마한 일에도 감탄하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어른이 되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청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는 끊임없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녀에게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매달릴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의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가 이곳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십시오. 과연 우리들은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보통의 어른들처럼 점점 약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삶은 과정이지 체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칼 로저스).



브라우니! 물어!! 주교님 방에 있더라구여.. 그래서 찰칵!!



하느님은 내게 괜찮다고 하신다(케이린 호트)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이라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인생을 멜로드라마처럼 살아도 괜찮은지.
하느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키가 작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매니큐어를 발라도 괜찮은지, 혹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아가야(그분은 가끔 나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네 맘대로 하려무나.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저는 또 물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문단 나누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내 귀여운 강아지야(대체 그분이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단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하느님께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안 괜찮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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