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18 조회수666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Learn a lesson from the fig tree.
When its branch becomes tender and sprouts leaves,
you know that summer is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he is near, at the gates.
(Mk.13,28-29)


제1독서 다니 12,1-3
제2독서 히브 10,11-14.18
복음 마르 13,24-32

한 공예 교사가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습니다. 교사는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작품의 양을 평가하여 성적을 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실제로 저울을 이용해서 학생들 작품의 무게를 달아 점수를 주었지요. 작품이 5Kg이면 A학점, 4Kg이면 B학점을 주는 식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그룹에게는 최고의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 A학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뜻밖에도 최고의 작품은 양으로 평가하는 그룹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그룹의 학생들은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를 통해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질로 경쟁하는 그룹은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토론하는 데 긴 시간을 보냈고, 결국에는 장황한 이론과 쓸모없는 진흙 덩어리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노력하는 것. 바로 지금 행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실험입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하지요. 정말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머릿속의 생각으로만 멈출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의 실천을 생각하면서도 몸으로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각종 핑계를 대지요. 나중에 더 큰 사랑을 하겠다고, 여유가 되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사랑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 실천하는 작은 사랑들이 쌓이고 쌓여서 최고의 사랑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 속에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과거라는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며, 미래라는 시간은 주님에게 맡겨져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얼마나 충실하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느냐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분명히 두려운 상황입니다. 최후의 순간이 어떻게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라는 것? 아닙니다. 최후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오기 때문에, 이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시지요. 심지어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에 매 순간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시간 되면 실천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여유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리고 최고의 사랑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그마한 사랑들이 모여서 큰 사랑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어떻게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퀴리부인).


내 마음도 이렇게 사랑의 하트를 만들어보세요.



하느님 나라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로 기억됩니다. 과학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아주 신기한 물건을 하나 가지고 오셨지요. 이것은 ‘현미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리와 유리 사이에 나뭇잎도 넣고, 또 물도 넣으면서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셨지요.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눈으로 볼 때에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이, 현미경을 통해서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현미경으로는 볼 수 있는 것. 어쩌면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입니까?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누군가가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또 다녀왔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고정된 사고로만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 나라.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철저히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