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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캐오와 라자로 [예수님을 보려는 내면의 눈]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19 조회수339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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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눈 먼 걸인, 오늘은 세리 부자입니다. 정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눈이 멀고 걸인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눈이 밝고 부자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돈
에 눈이 멀면 빈곤해 지고, 반대로 돈에 눈이 밝으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눈 먼 걸인은 [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 라고 하고, 세리 부자는 [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 라고 하고 있습니다

눈 먼 걸인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세관장 부자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하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인 당시의 지도층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멸시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할 것입니다. 

눈 먼 걸인처럼 적극적이든, 세관장 부자와 같이 소극적이든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인 측면이 아닌, 내적인 측면을 보시고 있다는 것이다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세리와 죄인들만의 메시아가 아니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나쁜 사람'으로 옭아매려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이런 죄악은 있기 마련입니다. 기존의 낡은 구태를 정화하고 새로운 가치로 쇄신하고자 할 때, 그 당사자를 '나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몰아 세우는 악행을 벌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함께 동행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질까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러 나가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방문한다거나, 교황님께서 방문하신다고 하면 그분들을 보려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구경만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고 혹은 '함께 있기 위해서' 보러 나가게 됩니다. 자캐오는 그 둘 중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낡은 가치는 버리고, 새로운 가치로 쇄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반대자가 아닌,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충실히 따르는 준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은 '새 인간'으로 변화되어 집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의 풀을 덮어 씌워 '자기 무덤'에 갇혀서 살지 말아야 하지는 않을까요. 새롭게 변화되면 예수님을 구경하는 옛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새 사람이 됩니다. 가짜 마리아의 온갖 세상적 거짓된 논리에 붙잡혀 예수님께로부터 뒤돌아서 가게 하는 사람들은 눈 먼 걸인을 제지하고 자캐오를 가로막는 군중들의 소음에 불과합니다.

가짜 마리아의 사탕같은 발림의 속삭임에서는 결코 '자기 무덤'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 38 - 44) ]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생명의 참된 목소리입니다.

죽음의 달콤한 속삭임은 무덤 속에서 살아라고 하는 유혹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탕녀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만이 자기 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르침)을 듣고 걸어나올 수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죽음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진정한 회개가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무덤 속에서 살게 하는 달콤한 속삭임은, 결코 자기 자신을 회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새 인간이 되지 못하고, "탕녀의 지체"가 되어 옛 인간으로서 영원히 죽을 뿐(둘째 죽음)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가짜 마리아는 구원자가 아닙니다.예수님과 참으로 함께 있고 싶다면, 외적인 측면 보다도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내면의 눈' 먼저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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