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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22 조회수79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As Jesus drew near Jerusalem,
he saw the city and wept over it, saying,
“If this day you only knew what makes for peace?
but now it is hidden from your eyes.
(Lk.19,21-22)


제1독서 묵시 5,1-10
복음 루카 19,41-44

언젠가 맛 집이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특히 짬뽕에 있어서는 그 어떤 집보다도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하더군요. 가보니 그 중화요리 집에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로 ‘맛 집은 맛 집인가 보다’ 싶었지요.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짬뽕 한 그릇을 받았습니다. 군침을 흘리며 가장 먼저 국물을 숟가락을 퍼먹는 순간, 동시에 큰 실망감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짬뽕 국물이 너무 매운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매운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는 좋아할 음식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맛 집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집이 과연 맛 집일까요? 사람마다 다 입맛이 다른데 어떻게 이곳은 맛 집이고 저 집은 맛 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요즘 즐겨가는 곳이 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밑반찬도 잘 나와서 특별히 갈 곳이 없으면 이 집을 갑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신부님들께 인천 맛 집으로 선정된 곳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었지요. 그런데 신부님들께서는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면서 별로라고 말씀하네요. 저한테는 너무나 맛있는 집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을 보면 이렇게 획일화 시키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자신의 입맛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 안에서도 이러한 획일화로 아픔과 상처를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기준에 의해 저 사람은 옳은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획일화를 시키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획일화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이 더 윗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우십니다. 평화의 도시,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성이지만, 이 안에 참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또한 그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큰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요.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획일화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획일화가 큰 죄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바로 자신들의 이권만을 생각하는 획일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고통과 아픔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이러한 획일화가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의 현 상황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어쩌면 단순히 우시는 정도가 아니라, 통곡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나의 뜻을 더 윗자리에 올려놓는 획일화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얼굴에 슬픔이 아니라 웃음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모두 똑같기를 원했다면 신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을 것이다(코란).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곳에 세운 눈물성당.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
 

제게 상담을 청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 사연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가족사, 연애, 금전적 문제, 신앙적인 갈등 등등... 참으로 많은 종류의 상담을 하게 됩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왜 내게 오셨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얼마나 답답하시면 제게 오셨을까 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하긴 고해소에 들어오셔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도 뵌 적이 있었지요.

“신부님, 제가 지금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데 계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멈춰야 할까요?”

경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숙맥인 제가 어떻게 판단해서 답을 내리겠습니까? 아무튼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답변하기 힘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들어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않는 것은 함께 기도하겠다는 약속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담이 끝난 뒤에 많은 분들이 “신부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들어만 주었을 뿐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제가 기도하는 내용에 하나하나 꼭 집으면서 토를 다신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계속해서 “이건 하지마. 저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해.”라는 식으로 모든 점에 있어서 간섭을 하시면 어떨까요?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깨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것 자체가 재미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무슨 기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침묵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정해주는 사랑에 비해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요? 계속해서 간섭을 하고 방해하는 사랑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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