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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24 조회수657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Lk.20,38)


제1독서 묵시 11,4-12
복음 루카 20,27-40

비행기를 타자마자 곧바로 나오는 방송 안내 멘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대략 이렇습니다.

“머리 위에 있는 선반에서 산소마스크가 떨어지면 먼저 쓰시고 주위의 다른 승객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나부터 먼저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노약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이렇게 자기 자신만을 먼저 신경 쓴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17초 안에 산소마스크를 써야만 합니다. 기내에서는 산소 공급이 끊기면 17초 안에 의식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 17초가 지나면 그 누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어 이 땅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금 내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순간의 만족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다고, 행복하지 못하다면서 이 세상의 삶을 낮게 평가하고 불평불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경우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지요.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부활 역시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세의 율법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협되고 닫혀 있는 생각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히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을 잘 사는 방법이며, 내가 이 땅에 창조된 의미를 살리는 길인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온 행동이다(파올로 프레이레).



이곳은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구역!!



기억의 파편(데비드 홀리스)
 

처음 몇 번은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이 몹시 두려웠다.
변화의 드라마를 살면서
늘 당혹스러웠다.
그때는 몰랐다.
대양의 파도가
모래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덮쳐버린 듯,
모든 곳이 이제 그 어떤 곳도 아니란 사실을.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기억을 잃은 순간은
점점 더 조용해지면서
나의 인식에서 멀어져갔다.
기찻길 옆에 살다 보면
점점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기차 소리처럼.
그러던 어느 날
“얼마나 자주 기억을 잃어버리나?”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기억이 단절된 순간을 생각해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이 있는 곳을 명확히 인식하는 상태와 대비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니며
그런 상태는 내 삶에서
굴뚝의 연기처럼 조용히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나는 이제
기억을 잃는다는 사실이 무의미한 곳에
느긋하게 닻을 내리고 살아간다.
나는 이제
필요할 때만
내가 있는 장소를 인식한다.
거기에는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다.
자동차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듯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몸짓만 있을 뿐이다.

50세가 되면서 기억을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한 시인 데비드 홀리스가 쓴 시입니다. 그는 이 시의 첫머리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난해 언젠가 이 시를 썼나 봅니다. 치매가 진행되는 과정을 그린 다른 시들과 함께 이 시가 책상 위에 있더군요.”

슬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기억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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