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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25 조회수672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1월 25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You say I am a king.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Jn.18,37)


제1독서 다니 7,13-14
제2독서 묵시 1,5ㄱㄷ-8
복음 요한 18,33ㄴ-37

어렸을 때 저는 참 핑계를 많이 댔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운동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운동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기에 급급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갑자기 다리가 아파서, 상대방의 옷이 더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서…….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제 자신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 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바로 ‘탁구’였습니다. 탁구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쳤기 때문에, 그리고 잠깐 동안 전문적으로 탁구 코치까지 받으며 배웠기 때문에 상대방이 현역 선수만 아니라면 웬만하면 다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통 사람들과 탁구를 치면 상당한 실력차이를 보이면서 제가 이기게 됩니다. 그런데 저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들과 탁구를 치면서 핑계를 댈까요?

“제가 좀 더 잘 칠 수 있는데, 탁구라켓이 좋지 않아서 잘 안 되네요.” 등등의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점수를 잡아주기도 하고, 또 상대방이 더 좋은 라켓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도 월등한 실력차이로 이길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핑계나 변명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핑계와 변명들이 어쩌면 스스로 능력이 없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문제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외부의 조건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기울이려고 하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문제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핑계와 변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이며 군 의료 개혁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결코 변명하거나 용납하지 않았기에 성공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나이팅게일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존경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엄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내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고 있을까요? 혹시 갖은 핑계와 변명으로 자신의 합리화만을 일삼으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오히려 남들에게는 엄격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말 그대로 임금이신 예수님을 기리는 날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임금과 같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과 다릅니다. 즉, 권위와 재력과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써 영광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참된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의 노력과 남들이 근접할 수 없는 힘으로 핑계와 변명 없이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울수록 핑계와 변명은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하느님의 기준을 내세울 때, 자신의 지금 모습에 책임을 지면서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춤 못 추는 사람이 바닥을 탓한다(힌두 속담).


종이 한 장에서도 웃을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함에 반했습니다.


 

나의 형편없는 글씨체
 

저는 글씨를 잘 못 씁니다. 악필도 이런 악필이 없지요.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제가 무엇을 썼는지도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형편없는 글씨체가 바로 저의 글씨체입니다. 뭐 누구는 저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재는 악필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천재가 아닌 것이 분명하며, 아쉽게도 동시에 글씨도 못씁니다.

이러한 저를 생각하면서 항상 글씨 좀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제가 신학생 때 썼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의 제 글씨체였지요. 사실 전에는 제가 워낙 글을 못쓰다보니 혹시라도 옛날에 썼던 글들이 보이면 남들이 볼까봐 얼른 찢어 버리기에 급급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글에 오히려 정감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일들이 떠올려지기도 하고요. 물론 분명히 삐뚤삐뚤하게 쓰인 형편없는 글씨인데도 말이지요.

무조건 부정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어느 한 순간이 내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은 스스로를 부정하기에 급급할까요?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저 역시 글씨를 잘 못쓰지만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못 쓴 글씨가 먼 훗날 그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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