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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소(聖召)와 신원(identity) - 11.30. 금,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30 조회수43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11.30 금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10,9-18 마태4,18-22)

 

 

 

 

 


성소(聖召)와 신원(identity)

 

 

 

 

 


내 신원과 직결되는 성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부르셨다.’

바로 여기 내 신원의 열쇠가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칼트).’ 아니라

‘나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쉘).’의 말이 맞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인의 바로 성소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주님이 나를 불러 주실 때 본래의 참 나의 존재가 됩니다.

바로 이게 성소의 은혜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성소는 은총이자 운명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했습니다.

그러니 성소는 순전히 은혜입니다.


오늘 복음을 봐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시고 부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먼저 보고 부르시지 않았다면 이 어부 형제들은

평생 갈릴래아 호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참 나가 누구인지 모른 채

평생 익명의 존재로 살다가 세상 마쳤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은총의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하고 주

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어부들입니다.


자기, 소유, 사람,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어부들입니다.

 

만약이라는 말이 부질없는 말이지만,

만약 우리 역시 주님과 운명적 은총의 만남으로 지금 여기 있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참 나를 잊고 어디서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 나의 존재를 찾아 만나지 못하고 방황하다

인생 마치는 지요.

 

 

 

 

 



둘째, 성소는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한 번의 부르심과 따름으로 끝나는 선물의 성소가 아니라

평생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야 할 과제인 성소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의 과정은 네 단계로 뚜렷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고, 부르시자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의 응답입니다.

 


보심-부르심-버림-따름이 일련의 연쇄 고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이 우리가 평생 죽을 때까지 따라야 할 과제입니다.


매일 미사나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부르시면 우리는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주님의 부르심과 따름은 날마다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훤히 트인 대로를 주님 따라 가는 게 아니라 매일 주님과 함께,

또 형제들과 함께 길을 내며 가는 성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를 통해 하루하루 성소의 길을 내 주십니다.

 

 

 

 

 



셋째, 성소는 선교입니다.

 


주님을 막연히 따르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일에 협조자로 참여함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선교소명입니다.

선교는 우리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 역시 평생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

우리에게 선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사람을 잡은 사랑의 그물, 하느님의 그물인 선교사로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삶과 선교는, 관상과 선교는 하나입니다.

어디서나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우리 오틸리안 베네딕도 연합회는 선교 베네딕틴으로 명시되어 있고,

지난 20차 총회에서도 선교의 본질을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witness God's love)'으로 정의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르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구원의 믿음도 없습니다.

하여 부단히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미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이요

삶과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수도자든 평신도든 주님 따라 선교 사명에 충실하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삶보다 아름다운 삶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에게

수도원 자체가 선교의 장이자 치유의 장입니다.

 

얼마 전 저의 9월 강론집, ‘삶의 여백(餘白)’이란 제목을 보고

좋아하던 분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백이란 말이 마음 넉넉하게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여백(餘白), 여유(餘裕), 여가(餘暇)가 없는 팍팍한 세상이라

  그러한 가 
봅니다.”

 


여백에서 이뤄지는 주님의 치유입니다.

수사님들이 지금과 같은 연 피정을 좋아하는 까닭도

넉넉한 내외적 여백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말씀이 선포되는 ‘선교의 장’ 수도원은

동시에 ‘힐링(치유)의 장’, ‘힐링(치유)의 센터’입니다.


하여 수도원의 넓은 내외적 공간의 여백에서

위로와 평화, 치유를 위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며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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