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동산의 꽃과 풀들] 가을 성모 동산의 결실들, 밤 · 박 · 석류 - 엘 그레코, <밤나무 아래에서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초목들은 대체로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왕성하게 자란 끝에 가을이 되면 한해를 치열하게 살아온 결실을 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초목들에서 그 나름의 메시지를 읽어 냈다. 밤 갈색으로 반짝이는 열매를 내어 주는 밤나무는 참나무과 낙엽교목으로, 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북부 아프리카 등 온대 지역에 10여 종이 분포한다. 그 중에서 한국·중국·미국·유럽 지역 밤나무들의 열매는 단맛이 뛰어나서 식용으로 인기 높다. 우리나라에는 밤나무가 중국의 승려들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대 왕조들은 밤나무 재배를 권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왕이 농경지를 제외하고 나무가 자랄 만한 곳에는 밤나무, 옻나무, 닥나무를 심게 했고, 조선 시대에는 법전인 ‘경국대전’에 밤나무 과수원 관리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부역을 면제하면서까지 밤나무 재배와 생산을 독려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 병충해로 말미암아 토종 밤나무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고, 지금은 해충에 강한 토종 밤나무들과 일본의 밤나무를 개량한 품종들이 재배된다. 소아시아에서는 열매의 단맛이 뛰어난 밤나무를 오래전부터 재배했다. 그리고 이 품종(유럽 밤나무)이 로마 제국 시대에 유럽에 전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섬나라 영국에서도 1천 년 이상 된 밤나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유럽 곳곳의 여러 수도원들은 정원에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 밤나무의 학명은 카스타네아(castanea)인데, 이는 밤나무를 일찍부터 재배한 소아시아의 도시 이름 카스타니스(Castanis)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이름의 뿌리는 ‘순결한, 정결한’이라는 뜻의 라틴어 카스투스(castus)다. 이름에서 그리고 열매의 독특한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밤을 정결(순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밤은 가시로 뒤덮인 겉껍데기 안에서 보호될뿐더러 그 가시들로부터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바, 정결의 덕[貞德]이 가시들로 상징되는 육체적 유혹들을 물리치고 거둔 승리이고 가시투성이 밤송이 안의 알밤이 그 승리의 결실을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 수도원들이 밤나무를 재배한 것도 아마 이런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시로 뒤덮인 밤송이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밤은 원죄에 둘러싸여 계시면서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원죄 없으신 잉태도 암시한다. 성미술 작품에 더러는 밤나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밤나무의 본줄기를 자르면 그루터기에서 길고 곧은 가지들이 새로 돋아나서 왕성하게 자라는 특성과 관련된 상징성이다. 박 박은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만, 이 땅에 초가집이 많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박을 심어서 줄기가 지붕으로 타고 올라가게 했다. 그리하여 가을이면 크고 둥근 박들이 초가지붕 위에서 영글어 갔다. 인도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박이 한국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박은 열매를 관상용으로, 식용으로, 생활용기로, 또한 수박의 대목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재배되었다. 서양에서는 박이 흔히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와 관련되는 식물로 이해된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가 못마땅해서 끝까지 그분께 맞섰다. 그런 요나를 하느님께서는 한 식물을 이용하여 깨우쳐 주셨다(요나 4,5-11 참조. 우리말 성경에는 이 식물이 ‘아주까리’로 번역되어 있는데, 성경 판본에 따라서 ‘박’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영어 관용구 ‘Jonah’s gourd’, 곧 ‘요나의 박 덩굴’의 뜻은 그래서 ‘급속하게 성장했다가 이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전에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은 박을 길을 나설 때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그릇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박(조롱박)은 사도 성 야고보(대)와 라파엘 대천사를 가리키는 특별한 표지가 되었고, 또 때로는 부활하시어 순례자처럼 꾸미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련성 때문에 박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게도 되었다. 성미술 작품에 박이 더러는 사과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도 박은 주님의 부활을 뜻한다. 악 또는 죽음을 상징하는 사과에 대응하여 악과 죽음을 해소하고 극복하게 해준 것이 주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석류 석류나무는 석류나무과의 낙엽소교목이다. 서아시아와 인도 서북부 지역이 원산지이며, 한국에는 고려 초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전 등에는 석류나무가 남부 지방에서 심어 기르는 나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이제는 서울과 경기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석류나무는 관상용 또는 약용으로 재배되는데, 5∼6월에 붉은 색 꽃이 피고 여기서 맺힌 열매가 9∼10월에 갈색이 도는 노란 색 또는 붉은 색으로 익는다. 여성호르몬과 유사한 성분을 많이 함유하여 ‘여성의 과일’이라고 불리는 석류의 속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고 각 방에는 즙이 많은 붉은빛 과육이 씨앗을 둘러싼 모양의 소낭이 들어 있다. 석류는 씨가 많은 과일이어서 동양에서는 포도와 더불어 다산을 상징하는 과일로 꼽혀 왔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석류를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다. 한 열매 안에 수많은 씨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씨들은 교회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교회와 하나를 이루는 신실함을, 그들이 믿는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을 상징한다. 석류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일찍이 다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게 되었다. 열매가 익으면 과피가 벌어지는데, 이때 붉은 과즙은 그리스도의 피와 고통을, 씨들이 밖으로 돌출해 나오는 현상은 그분이 무덤을 열고 나오시는 부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련성으로 해서 성모자를 그린 성미술 작품에서 석류를 종종 볼 수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10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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