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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 a [편집, 보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13 조회수979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가 성요한의 [ 정화 단계와 이중적인 구분 ]은 반드시 순서적이고 차례적인 것이 아니다. 정화 단계 (감각의 정화단계 / 영혼의 정화단계)와 이중적인 구분 (능동적 정화단계 / 수동적 정화단계)은 나열이 아닌 병행의 관계이다. 감정, 육신, 마음, 영혼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영혼입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자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초점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합일에 맞추고 있습니다. 체험에 있어서의 수덕(능동적 정화)과 하느님의 은총(수동적 정화)의 이중적 국면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자세로 수덕하는 능동적 정화와 당신께로 초대하시고 이끄시며 베푸시는 초자연적 은총인 수동적 정화의 병행 구조 입니다.

구체적 정화의 단계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외부세계 즉, 감각세계 그 자체를 나쁘다거나 유해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방해한다고 해서 감정이 영적 생활에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적 감정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초연함은 무감각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 예수님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인간이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은 욕망과 맛으로부터 의지적으로 이탈하지 못한 경우 자신을 정화시킬 수 없습니다. 감흥적인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은 우선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과 일치코자 하는 영적인 갈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모든 행동들은 참아 견딜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입니다.“순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외에 다른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 감각의 정화 :  감각, 욕망, 자애심에 대한 정화 ]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첫째 우리의 의지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하며 둘째 하느님의 영예와 하느님의 영광에서 기인하지 않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영혼이 포기하는 일이다. 비움이 먼저이냐, 은총이 먼저이냐 하는 것은 별 소용없는 토론입니다. 사람의 노력(수덕)이 당연히 필요하나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비워지지 않는다 할 것입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자꾸 부으면 차갑던 물은 점차 뜨거워 집니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룰 수가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빛으로 완성 되어지기 때문이다는 설명이 될 것입니다. 다시 부연한다면,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곧, 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자신을 비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 줄 때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그런데도 이를 행동하지 못함은 자신을 비우지(버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기가 싫기 때문이다고 할 것입니다. 자애심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 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겠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성체성사적인 것이 바로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영적이며, 하느님의 빛다움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영혼의 절대적인 자아 포기와 깊은 겸손, 곧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입니다. '감각적인 메마름'과 맛없음은 새로 지은 죄나 결점, 우울증, 해이와 미온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화적인 메마름'은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말씀을 의심)에 대한 교만과 함께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입니다.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고, 하느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 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입니다. 관상이란 다른게 아니라 하느님은 은밀한 '내림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비추심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리라")으로 얻게 된 비천한 자아 인식의 실상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인식이 나오게 됩니다.자기 비하와 자기 비참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적 겸손을 얻게 됩니다. 영적 겸손으로 인하여 감성과 이성의 오만, 그리고 마침내는 영성의 교만에 딸린 일체의 악습들이 씻겨져서 십자가의 길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 중간단계 / 조명 -

십자가의 성 요한이 ‘중간 단계’를 구분한 것은 전통적인 영성 생활의 세 단계인 ‘정화-조명-일치’의 도식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시기의 상태를 보시고 각자의 회개의 때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영의 정화 :  이성, 기억, 의지에 대한 정화 ]

환시나 계시, 그 밖의 천상 사정에 관한 감미로움은 영성 생활을 하는 이들의 관심사이지만 이 모든 것도 가장 작은 겸손한 행동과는 비길 수 없습니다. 수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나타나 주기를 바란다거나 성모님께서 나타나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가장 작은 겸손한 행동과는 비길 수 없습니다. 겸손은 애덕과 같은 결과를 갖고 있어서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리고 '선'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즉 하느님께 영적으로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에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세가지 향주덕(믿음,희망,사랑)을 통해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영의 정화란 : 이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하게 하고, 기억으로 하여금 희망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하며, 의지로 하여금 사랑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덕(믿음)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희망)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성체성사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 '삼위 하느님과의 합일' / 의로움 / 완전함 / 거룩함 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모신다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이행'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고린토6, 16 참조>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신덕(믿음)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신덕은 이성을 어둡게 하고 비게 함으로써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신적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이성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곧, 지식은 믿음 우위에 있지 않다. 영지주의, 그노시스주의 참조) 오로지 신덕(믿음)으로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복음 말씀)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망덕(희망)은 영혼으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에서 이탈하여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원리로 망덕이 기억을 정화하게 되는 것이다. 애덕(사랑)에서 있어서 의지로 다스려지는 모든 것은 영혼의 힘이다. 의지가 모든 욕구를 하느님게 향하도록 하고 (거짓된 메시지 혹은 거짓된 강의 및 출판물 등으로) 하느님 아닌 것에서 빗나가게 하면, 그 때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힘을 간직하는 때이다. 바야흐로 영혼은 모든 힘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상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영혼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써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이 때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 하느님 안에서 정화된 사랑, 내어주는 십자가의 사랑 ] 이다.

고통을 성인은 어둔 밤에서 묘사하고 있다. “첫째, 관상의 빛과 지혜가 매우 밝고 맑은 반면 빛을 받는 영혼은 어둡고 불결하다함은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 밝은 빛이 쏘아 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 “둘째, 영혼이 그의 자연적, 영성적 약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령한 관상이 영혼을 굳세게 만들고 휘어잡을 양으로 하나의 힘을 쓰는 까닭인데 가뜩이나 약해서 괴로운데다가 더구나 호된 힘이 쏘아 붙일 경우이면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까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면 안된다. 하느님의 빛(말씀)과 사랑(하느님 안에서 정화된 사랑)이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된다. 즉 완전한 밝음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들어가기 위해, 빛 때문에 장님이 되고 바보가 되며 사랑의 아픔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무가 그 뿌리를 살진 토양에 깊숙히 박고 있을 때만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인간도 근원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하나가 되어,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열려 있는 겸손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서게 될 때 비로소 구원이 열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앙의 성장이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서 또는 우리의 잘못된 시각에 의해서 비뚤어진 감각 혹은 감정을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그렇게 감각과 영을 정화 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 내면의 감정을 개방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감정과 한계가 드러나는 그곳에, 노력과 절망이 드러나는 자리에, 하느님의 빛이 개입하게 된다. "순명(말씀에 복종)이 없는 고행(단순한 행동주의)은 짐승들의 고행일 따름이다. 믿음의 순종이 없는 고행, 거기서 얻는 맛과 탐욕에 움직이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 (우상화를 없앰, '순수 그리스도')이라고 성인은 대답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에 이르기 전까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십자가의 신비 (자기 십자가,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이행')를 몸소 체험하며 신앙의 깊이를 다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지팡이이며 요한에게는 ‘길’이요 체험의 근본이 된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곧, 자신을 내어 주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뜻한다. 성인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체험을 언어로 표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결코 없었다.  < 2005년 >





< 참고 :제 개인적인 영성도 삽입 편집 보완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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