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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15 조회수535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2월 15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Mt.17,11-12)


제1독서 집회 48,1-4.9-11
복음 마태 17,10-13

오랜만입니다. 일주일 만에 이렇게 뵙네요. 저는 지난 주일에 한국을 출발해서 동창 신부가 있는 미얀마에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한국은 무척 추웠다고 하던데, 미얀마는 아주 따뜻한 날씨였답니다. 아무튼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좋은 시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이 아니었나 싶네요. 감사하고요.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이 점차 나빠지는 것에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즉, 왼쪽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한 동안 오른쪽 눈만을 사용하고, 이 오른쪽 눈이 나빠지면 그때 왼쪽 눈을 사용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부터 왼쪽 눈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오른쪽 눈이 나빠져서 더 이상 사물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왼쪽 눈을 사용할 때가 되었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렸던 왼쪽 눈을 풀었지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람의 생각대로 그동안 아껴두었던 왼쪽 눈이 드디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을까요?

아닙니다. 어두운 동굴에 사는 동물의 눈은 퇴화되어서 볼 수가 없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왼쪽 눈을 나중에 쓰기 위해 아꼈지만, 오히려 쓰지 않아 퇴화되어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아끼는 것이 아니라 전혀 쓸데없는 내 모습을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로 미룰 때가 많습니다. 지금이 아니라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리고 여유가 되면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없습니다. 바로 지금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지금만이 내 최고의 모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례자 요한을 떠올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 탓, 환경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주님을 가장 잘 준비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벌써 대림 제2주간도 다 보냈습니다.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 시기가 벌써 반이나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어떤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혹시 아직도 미루고 남 탓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책임전가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 주님을 잘 준비할 수 있으며, 주님을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대림 제2주의 마지막. 그 마지막이 바로 가장 의미 있는 날들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는 것이 훨씬 값지다(위지안).



미얀마의 바간에서 본 석양입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애매한 말과 행동은 그만.
 

몇 년 전에 알고 있었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 저는 ***입니다. 기억나시죠? 신부님 함께 식사 한 번 하시죠? 오늘 시간 되세요?” 그런데 이 분을 만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저를 난처하게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어떻게 “저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바빠서요. 도저히 시간이 안 되겠는데요?”라고 대답했지요. 하지만 이분께서는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럼 내일은요? 아니면 모레는 어떻습니까? 뭐 이번 주 아무 때나 신부님 시간 날 때를 확인해보세요.”

정말로 난처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깨달았지요. 거절의 말을 확실하게 하는 것 역시 그 사람을 위한 진정한 배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애매한 태도는 인생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도 애매한 태도를 보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는데, 악의 부분에도 일부분, 선의 부분에도 일부분 몸을 담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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