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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에서 아래로 -소통과 화합의 길- 12.15. 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15 조회수31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2.12.15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집회48,1-4.9-11 마태17,10-13

 

 

 

 

 



위에서 아래로

 

-소통과 화합의 길-

 

 

 

 

 



‘신문을 성경 보듯이, 성경을 신문 보듯이’

개신교의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의 명언입니다.

현실과 유리된 성경을 경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위에서 아래로-소통과 화합의 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겸손히 제로(0)에서 새롭게 시작할 때 저절로 소통이요 화합입니다.

 


몇 가지 예를 나누며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 중 다음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젊은이들이 많은 데 천주교는 온통 노인들입니다.

  단체장들도 60-70대로 노령화되는 추세입니다.”

 


노령화되는 교회입니다.

젊은이들이 없는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20-30대의 청년들은 나라의 희망인데

가장 힘겹게 절망 속에 지내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대체 마땅한 일자리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에게 극구 사양하던 노인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젊은이가 자리에 앉아.

  요즘 젊은이들 살기에 얼마나 힘든 세상인데.

  난 별 일이 없는 사람이야.”

 


끝내 자리에 앉지 않고 젊은이를 자리에 앉힌 젊은 노인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며칠 전 노령기에 접어든 어느 언론인의 신문 기사도

신선한 자극이었습니다.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

국민연금을 조금 받고 있는 남편은 얼마 안 있으면

자신이 낸 돈보다 더 받게 된다고 열없는 표정을 짓는다.

…“노약자석에 앉지 말고, 출퇴근 시간에는 타지 말고,

앉았더라도 피곤해 보이는 젊은이가 보이면 자리를 양보하라.”고

신신당부한다.

…노령인구가 또 달갑지 않은 통계에 잡혔다.

대선을 앞두고 B후보를 지지하는 60대 이상의 수치가 60%를 넘는다는

여론조사들이 나온다.

반대로 20대에서 40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미래세대가 원한 사람은

60%가 M후보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또 이렇게 미래세대의 발목을 잡는 게 노령인구인가.

…더는 아무 말도 못하겠다.

나이 든 게 부끄러워서.-

 


젊은이들의 짐을 덜어주고 앞길을 열어주는 노인들이라면

얼마나 멋있겠는지요.

 


요즘 송년회 건배사는 ‘소화제’라 합니다.

‘소통과 화합’ 중

'소'자와 '화'자를 합친데 '제'를 붙여 소화제한다 합니다.

 


그만큼 불통과 분열의 시대라는 반증입니다.

불통과 분열의 치유가 참 절실한 시대입니다.


불통과 분열을 조장하는 게 큰 죄입니다.

 

불통과 분열에서 소통과 화합에로의 전환이 바로 회개이며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엘리야나 엘리야의 재림인물로 알려진 세례자 요한은

말 그대로 소통과 화합의 사람들입니다.

 


1독서 집회서에의 엘리야의 활약상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 사람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길을 내며

소통과 화합을 위해 힘쓰지 않습니까.


다음 대목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시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 중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to turn back the hearts of fathers
toward their sons)’라는 구절에서

저는 즉시 소통과 화합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기성세대들은, 부모들은 젊은 세대의 마음으로 내려와야

비로소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도 가능합니다.

 


젊은 세대를 위로 끌어 올릴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아래 마음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아래의 땅으로 내려오셨고

바로 이런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그대로 떠맡고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은 것이다.”

 


참 역설적인 게 소통과 화합의 노력의 결과가 고난입니다.

아마 강고한 기득권층들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요한이나 예수님 역시 소통과 화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위 대목 중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Elija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란 구절이 반갑습니다.

 


회개를 통해 소통과 화합으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란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론 예수님 역시

바로 이 일을 위해 세상에 파견되셨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소통과 화합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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