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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17 조회수638 추천수12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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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 마태1,1-17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깊은 상처 그 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어려운 시절 한국에 선교사로 오신 파란 눈의 외국인 신부님들, 한국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한국식 성이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외국 이름이 Robert인 경우 제일 앞 글자를 따서 노신부님이라고 성을 지었습니다. Maurizio인 경우 마신부님으로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웃기는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 신부님 앞으로 정체불명의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족보 팔아먹는 업체에서 한국 신부님인줄 알고 선교사 신부님께 족보를 팔아먹으려고 집요하게 전화를 했고, 뭔지 모르는 착한 선교사 신부님, 한부 보내달라고 하셔서, 30만 원짜리 큼지막한 족보 책이 간이세금영수증과 함께 도착했더랍니다.

 

    족보, 요즘이야 그게 뭐 대단한 거냐고, 여기지만 과거 우리 어르신들 마치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전쟁이라도 날라치면 집문서나 땅문서와 함께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족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족보라는 것, 마치 뿌리, 생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사 다닐때 마다, 유배 갈 때,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조차도 족보를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 조상, 민족, 뿌리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첫 부분인 마태오 복음서, 그 첫 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서두에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낯선 이름들이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까요? 왜 복음서 첫 출발이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사람 이름으로 시작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그 한가운데 현존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기도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정도의 천상 용모를 지니신 분,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닿지 못하는 아득한 먼 곳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위에 두발로 굳건히 딛고 서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우리 인간사, 폭풍 속 같은 우리 인생살이 한 가운데서 들어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뚜렷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간통행위, 솔로몬의 배교행위,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추문록, 왕실의 혈통 안에 버젓이 끼어들어있는 이방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상처투성이뿐인 인간의 역사, 인간의 고통, 인간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의 재림은 비록 이스라엘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측, 다시 말해서 인간 측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도래합니다. 거듭되는 인간 측의 불충실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유대관계는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측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깊은 상처, 그 사이를 비집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스며들어 오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깊은 좌절을 딛고 하느님께서 일어서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멸망과 죽음을 기반으로 하느님께서 살아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결핍 투성이인 우리 인간사 안에서 당신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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