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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22 조회수570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2월 22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lowly servant.
(Lk.1,46-47)


제1독서 1사무 1,24-28
복음 루카 1,46-56

어제 어디를 가다가 갑자기 “신부님”이라는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급하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들은 소리라 깜짝 놀랐지요. 놀란 상태의 저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부른 사람은 예쁜 여학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제가 그 여학생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고요.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만났더라? 교구에서? 본당에서? 아니면 성지에서?’ 짧은 순간에 제가 지나왔던 과거의 부임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 안에서 이 학생의 존재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구....?”라고 말을 흐리며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신부님! 기억나지 않으세요? 저 **이에요.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잘 아는 학생인 것입니다. 거의 3년 만에 만났는데 예전의 모습보다 훨씬 더 예쁜 모습인 것입니다. “너 왜 이렇게 예뻐졌니?”하면서, 제가 몰라본 것을 마치 이 학생의 외모가 바뀐 것 때문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학생의 외모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지요.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마치 외모가 바뀐 것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주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알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이 만남을 계속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과의 만남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일이 너무 바빠서 이 일을 마친 뒤에야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뒤로 미루면 주님과 가까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더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앞서 그 학생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주님께서 바로 옆에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느님을 직접 보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직접 성모님께 나타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셨고, 그 끈을 절대로 놓지 않으셨기에 이렇게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오랜만에 만났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감동을 받게 될까요? 하느님은 오랜만에 만나도 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할 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관계의 끈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는 분만이 성모님께서 부르셨던 ‘마리아의 노래’를 역시 부르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므로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한다(에리히 프롬).



마니또로부터 선물받은 인형. 예쁘죠?



웃음
 

못생긴 얼굴은 성형수술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꿀 수는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스스로의 힘을 통해서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잘 웃는 사람들은 누구나 명랑하고 다정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전해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웃을 일이 없어서일까요? 그보다는 웃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진심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웃는 사람은 절대로 구제불능의 악한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 신나게 웃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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