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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24 조회수722 추천수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Lk.1,78-79)


제1독서 2사무 7,1-5.8ㄷ-12.14ㄱ.16
복음 루카 1,67-79

얼마 전에 약속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운전을 하지 않다보니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었고, 또한 책도 읽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한참을 이동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저와 만나기로 한 몇 분은 이미 나와서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저의 얼굴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얼굴이 뭐 묻었어요.”

그러면서 제게 그분이 가지고 있는 손거울을 보여주십니다. 이 손거울에 비춰진 제 얼굴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숯검정 같은 것이 묻어있었던 것입니다. 닦으면서 도대체 어디에서 묻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철 안에서도 사람들이 제 얼굴이 힐끔힐끔 쳐다보던 것을 기억해보니 꽤 일찍부터 묻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생각해보면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도구들이 많았습니다. 거울도 있고, 휴대전화를 이용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리의 쇼윈도에 비춰진 제 얼굴을 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 눈치 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얼굴에 무엇인가가 묻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에 오랫동안 검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묻히고 돌아다녔던 것이지요.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왜 쳐다보는 거지? 내게 관심 있나?’라는 식으로 엉뚱한 착각 속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 역시 이러한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주장만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리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시작하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음을 이야기해서 결국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짓는 데에 있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면서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면서 했던 찬미의 노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즈카리야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기의 뜻만을 주장했을 때에는 침묵하게 만드시는 하느님. 즉,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자신을 온전하게 되돌아 볼 수 있으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맞이할 날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 주님을 찬미하는 기쁜 성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배우는 데 그 에너지의 9할을 소진한다. 그리고 나머지 1할로 그 말을 살아 낸다(문진영).



어느 신부님의 방에서 화재가 났어요. 대림초를 켜놓고 기도하다가 졸아서... ㅋㅋㅋ



나의 기준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어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이번에 부제서품을 받는 신학생에 관한 것이었지요. 즉, 부제서품을 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가톨릭도 별 볼 일 없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고 계신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또한 오랫동안 성소 담당자들이 판단해서 내린 결정임을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이렇게 간단히 말할 뿐이었습니다.

“알았어요. 가톨릭도 별 볼 일 없어요.”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과연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다는 판단, 자기 기준이 곧 주님의 기준이라는 것일까요?

나의 기준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가지의 예를 들어보지요.

사과 10개가 있습니다. 이 사과를 10명의 사람에게 어떻게 나눌 때 공평할까요? 우리의 기준은 하나씩 나누면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눔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나눔은 배고픈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나의 기준을 보편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 역시 오늘 복음의 즈카리야처럼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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