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27 조회수871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They both ran,
but the other disciple ran faster than Peter
and arrived at the tomb first;
(Jn.20,4)


제1독서 1요한 1,1-4
복음 요한 20,2-8

신부로 살다보니 남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습니다. 미사 때, 강론 때, 강의 때, 훈화 때... 그런데 저는 다른 신부보다도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방송에서 불러주고, 본당에서 불러주고, 어떤 단체에서 불러주고, 또 회사에서도 불러주다 보니 참 많은 말을 이 세상에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강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말 참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가지만, 원고를 보지 않고 강의를 하다 보니 종종 삼천포로 빠집니다. 또한 왜 이렇게도 발음이 잘 되지 않는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매일 아침 발음 연습을 하지만 그리고 논리적인 강의를 위해 책을 그렇게 많이 읽고 있지만, 그다지 많은 성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고민으로만 가지고 있다가, 동창 모임에서 술 한 잔 마시면서 어떤 신부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말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줄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잖아.”

그 말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말을 줄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계속해서 말 잘 하는 것만을 궁리하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하긴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도 있지요. 즉, 말보다는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실천하는 나눔은 오히려 점점 줄어들고, 그럴싸한 말로만 사람들 앞에 나서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가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달려갑니다. 그런데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다다르지요. 하지만 무덤 안에는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장면을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욕심도 들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보다는 예수님의 선택을 받아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는 모든 제자들이 다 뿔뿔이 도망친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유일하게 있었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말만 앞서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예수님의 뜻을 먼저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사도 요한을 기억하면서, 그가 보였던 주님께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주님의 가장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귀한 당신,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멀어지지 마세요. 당신은 많은 사람의 아름다운 그늘이니(신경숙).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요?:



백년도 못사는 인생인데....
 

한 사나이가 위대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세속 생활이 그리워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어찌어찌하다가 사형 집행을 하는 간수가 되었지요.

어느 날 그는 사형수 한 사람을 데리고 형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형수는 개를 잡아다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그들이 형장으로 가는 도중 길 앞으로 살이 통통하게 찐 개 한 마리가 지나가자 고개를 푹 숙이고 가던 사형수는 갑자기 눈에 생기를 띠며 간수를 돌아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개를 잡아오면 내가 금화 두 냥에 사겠소."

간수는 어이가 없어 사형수를 꾸짖었지요.

"십 분 후면 이 세상에 남아 있지도 못할 놈이 무슨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사형수는 입을 씰룩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렇고 말굽쇼! 그리고 삼사십 년 후면 당신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못할 거구요!"

순간 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답니다. 곧바로 그는 사형수를 그 자리에서 놓아 둔 채 그곳을 도망쳐 버렸다고 하지요. 그리고는 그가 버리고 떠나 온 스승에게로 돌아가 다시는 세속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부유한 것, 지금 넉넉한 것, 지금 화려한 것.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며 우리는 늘 말하지요.

“정말로 후딱 지나갔어.”

그렇기 때문에 더 길게 생각하는 지혜로움을 가졌으면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말이지요.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