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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겸손은 모든 덕의 그릇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27 조회수821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12년 다해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축일


<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


복음: 요한 20,2-8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력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



     < 겸손은 모든 덕의 그릇이다 >

       성 브라더 로렌즈 수도사는 싸움이 제일 많기로 소문난 수도원에 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가 그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처음 부인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 그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한 달, 두 달, 석 달, 계속해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쏟아졌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 차 수도원을 들렀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은 그 앞에서 쩔쩔맸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이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들은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 단어로 종합하라면 당연히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교만으로 하느님과도 또 자신들 사이도 멀어졌듯이, 교만한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하시면, 하느님에게도 겸손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겸손하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의 지위로 당신 자신을 낮추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사람과 개보다도 훨씬 멀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셨지만, 인간은 개를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빌립 네리는 16세기 성인이신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신이 그런 일을 요구받는 것이 불쾌했던 것입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그릇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다면 사랑도 없고 그렇다면 성인도 아닌 것입니다. 겸손이 없다면 겉으로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단순히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식사를 한 제자였고, 골고타 언덕까지 그를 따라 올라간 유일한 사도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그의 더 큰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누군가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말에 급하게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자신의 뒤에 예수님이 수난 받으실 때 세 번씩이나 그분을 부인하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을 했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수장으로 뽑아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에다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이면서도 안드레아와 또 다른 제자 한 명이라고 씁니다. 절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이 겸손을 통해 그의 사랑과 거룩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겸손함이 거룩함의 증거입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도사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사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자아가 강한 사람에게 사랑이 스며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너무 노력하다가 겉으로는 무엇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교만만 가득 찰 수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첫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인은 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하였답니다. 성인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이라고 했고 모든 덕의 바구니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강론을 쓰면서 구체적인 예화가 생각이 나지 않아 가끔은 어떤 사람을 비판하여 스스로 나의 정당함을 강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강론을 올리느니 차라리 묵상을 올리지 않는 편이 낫다고. 그렇습니다. 겸손은 그릇입니다. 그릇이 새고 있다면 다른 것들을 노력해서 담으려고 해도 헛수고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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