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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12-30 조회수772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Jesus advanced in wisdom and age and favor
before God and man.
(Lk.2,52)


제1독서 집회 3,2-6.12-14
제2독서 콜로새 3,12-21
복음 루카 2,41-52

책을 보다가 깜짝 놀랄만한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고대 그리스인의 평균 수명은 19세랍니다. 그리고 16세기 유럽인들의 평균 수명 역시 21세에 불과했고, 18세기 프랑스에서 겨우 30세에 다다랐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1970년에 육십갑자의 ‘갑’으로 되돌아온다는 환갑이 평균 수명이 되었으며, 지금 현재 평균 수명은 80세가 넘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장수를 오복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베푼 잔치에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초대했다고 하지요. 또한 성경에서도 장수를 하느님의 큰 복이라 생각했기에 창세기에 보면 원역사와 성조사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장수했던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를 복이라 생각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노인들의 소득빈곤율과 자살률에서 1위를 차지했지요. 하느님의 축복인 삶이 오히려 저주요 불행으로 치부되는 것은 왜 일까요? 정말로 삶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닌 것일까요?

사실 그 누구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항상 젊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 상점에 가서 주로 듣는 호칭은 ‘아버님’이나 ‘아저씨’입니다. 젊음의 시간이 늘 나만의 시간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누구나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시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왜 이 시간을 피하려고만 할까요? 그러다보니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호칭 자체를 완전히 버린, 어른들을 공경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결책을 바로 우리의 가정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고 이 가정을 본받자는 의도로 제정된 축일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들었던 가정이 과연 어떤 가정일까요? 바로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였던 가정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요셉 성인을 남편으로 받아들인 성모님. 결혼 전에 이미 아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꿈에서 들은 명령을 듣고 성모님을 받아들이고, 성모님이 낳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셨던 요셉 성인.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보호를 자청해서 받으신 예수님.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였기에 성가정이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나의 가정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무조건 나의 기준에만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진정한 사랑보다는 나의 이익이 우선은 아니었을까요? 점점 주님의 뜻과 멀어지는 세상이 되는 것은 나의 잘못된 모습 때문입니다. 성가정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사랑을 거부하며 쌓아온 모든 장벽을 찾아내는 것이다(루미).


어제 눈을 맞으면서 산책했던 차이나타운. 눈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소원
 

인터넷에서 본 글을 그대로 적어 봅니다. 나의 소원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에는 오랫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 하는 부부가 나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가 들어선 날, 온 가족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아이 엄마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당신 아이를 위해서 소원 하나를 말하면 들어주겠소.”

막상 한 가지라고 하니, 너무나 고민되었습니다. 돈과 명예, 좋은 친구와 스승 등 여러 가지가 떠올라 망설여졌습니다. 아이 엄마는 말했습니다.

“아이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좋겠습니다.”

노인은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고 말한 뒤 사라졌습니다. 노인의 말대로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집에서는 온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예쁨 받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습니다.

아이 엄마가 잠을 자는데 수년 전 소원을 들어준 노인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제가 빈 소원을 이제라도 바꿀 수 있나요?”

“왜 그러는가?”

“아이가 늘 사랑받기만 하니 이기적으로 자랐습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냅니다.”

“그럼 무엇을 바라느냐?”

노인의 물음에 아이 엄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이가 사랑받기보다 먼저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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