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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02 조회수668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desert,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as Isaiah the prophet said.”
(Jn,1,23)


제1독서 1요한 2,22-28
복음 요한 1,19-28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귀를 자극시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심한 욕설이었지요. 그 욕설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입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연구 결과에서 ‘청소년의 73.4퍼센트가 매일 욕설을 사용’하고 ‘욕설을 쓰는 청소년 중 58.2퍼센트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처음 시작’했다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입을 모아 천박하고 폭력적인 언어 환경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어 순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성토합니다.

그런데 저 역시 청소년 때에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는지 많은 욕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처럼 거침없이 나오는 욕은 아니었지만, 심심치 않게 욕을 사용하면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 당시에 제가 욕을 했던 이유는 남들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어서였습니다. 욕을 하지 않으면 숙맥처럼 보이고, 친구들에게 약해보여서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간간이 욕을 섞으면서 말을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욕이 습관처럼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얼마 못가서 깨닫게 되었지요. 저도 모르게 무심결에 나오는 욕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남들에게 강하게 보이려고 사용했던 욕이었는데, 오히려 내 자신이 이 욕 자체에 매어있음을 깨달으면서 더 이상 욕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겉으로 강하게 보이려고 사용했던 욕.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겉으로만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비춰지는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께 비춰지는 내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지요. 남들과 다른 삶을 살면서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 사람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즉, ‘그가 바로 그리스도가 아닐까?’라는 기대였습니다. 이 사실을 세례자 요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곧바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명 “그리스도이다.”라는 답을 원했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답했다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또한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취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는 순간을 걷어차고 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비춰질 내 모습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례자 요한처럼 말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폴 틸리히).



1989년 신학교 입학 피정 때 찍은 사진. 이중에서 10명이 신부가 되었네요.



목욕탕에서...
 

새해를 맞이해서 목욕탕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욕탕을 가면 목욕만 하지 않지요. 사우나도 하면서 목욕탕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누리고 나옵니다. 저는 특히 이 사우나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고온 사우나’를 무척 좋아하지요. 뜨거운 곳에서 땀을 흠뻑 쏟은 다음에 냉탕에 들어가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어제도 ‘고온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사우나 안에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어서 모래가 떨어지게 했습니다. 보통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는 것을 두 번 반복한 뒤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평상시와 다르게 ‘고온 사우나’ 안이 너무나 뜨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래가 딱 한 번만 다 흘러내리면 나가자는 생각으로 모래시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더디게 흘러내리는지요? 한 번만 흘러내리는 시간이 5분밖에 되지 않는데, 마치 몇 십 분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도 이렇지 않을까요? 그 순간은 정말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지요. 그러나 내가 길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짧은 시간도 참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인내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일까요? 많은 신학자들은 ‘고통과 시련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어 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주님과 함께 견디어 낼 때, ‘별 것 아니었구나.’ 하면서 웃을 수 있는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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