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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 세례의 의미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13 조회수691 추천수10 반대(0) 신고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 3,15-16.21-22



세례의 의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시간 세례의 의미를 생각하는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깊은 산 속에서 산나물을 캐던 칠순 할머니가 산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먹고 어여쁜 아가씨로 변하였습니다. 집에 돌아 온 그는 늙은 영감에게 이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니, 자기도 젊어지겠다고 일러준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욕심을 부려 지나치게 퍼먹었는지 갓난아기로 변해버렸답니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삶이 바뀌지 않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산다면, 언제까지나 갓난아기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조금도 성숙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이란 날로 짐스럽고 힘들어만 가며 신앙은 결코 달고 가벼워야 할 사랑의 짐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행세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웃이야 어찌되든 자기 욕심만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잘못된 기복신앙을 사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32절에 ‘두 아들의 비유’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는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 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삶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하루끼니를 몽땅 거르고 지나는 분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한다면 몸의 기운이 떨어져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하여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이시면서도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틈에 끼여서 세례를 받으셨고, 그것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포기와 버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서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 보다 더 은혜로운 날입니다.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표징으로 새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상의 이름을 자주 불러 주어야 하고 새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술 좋아 하는 사람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모이겠어요? 노름 좋아하고 화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유상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매력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와 미사참례를 즐겨하고 전교를 기뻐하며 성경공부를 그리워하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정철’이라는 분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저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까요?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느새 쓰레기가 되고 맙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으신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때 듣게 된 음성입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의 모범을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거듭나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생활 안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 안에 항상 거듭나야 합니다. 세례로 말미암아 얻은 은총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고백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끊어버립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습니까?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 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구의 모태성당에서도 정초를 맞이해서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사주팔자를 보러 소위 ‘용하다는 집’을 찾는답니다. ‘신천지’에 기웃거리는 사람, 이미 발을 담그고 다른 사람을 한 번 와보라고 유혹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는 한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이요,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기쁨을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고 늘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당 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소금역할을 하는 3%의 사람이 있다면 그 곳은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티토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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