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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궁극적 존재이유를 파악하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21 조회수620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복음: 마르코 2,23-28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 궁극적 존재이유를 파악하라 >

            일본의 어떤 의자 디자이너는 수많은 의자의 디자인을 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기자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의자의 디자인이 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느냐고 놀라워하였습니다. 그 때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의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앉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의자를 디자인하겠다는 생각과,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의자란 단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보통 의자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해보면 훨씬 상상의 폭이 넓어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의 궁극적 존재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여, 밀 이삭을 따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한다고 단죄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잡아 줍니다.

우리가 돈을 위해 존재합니까, 아니면 돈이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까? 우리는 이미 답을 잘 알고 있지만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게 돈 때문에, 돈을 위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의 궁극적 존재이유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기 십상입니다. 가진 돈을 모두 잃게 되었거나, 명예가 실추되어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지배해야 할 것들에 지배를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청바지 차림의 한 신사가 은행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는 사업상으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은행에서 의논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마침 담당 직원이 외근 중이라서 만날 수가 없었고, 해당 부서에 상담해 줄 지점장도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앉아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상담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하는 여직원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일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여직원에게 자동차 주차권 확인 도장을 좀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했는데, 여직원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와서 저금을 한 것도 아니고 인출 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 찍어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은행의 방침이고 규칙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그가 다시 와서 150만 불을 모두 인출 해 갔습니다. 그는 IBM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융통성이 없고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은행과 거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은행 여직원은 회사의 방침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회사에 커다란 손해를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은행 여직원이 은행의 규칙이란 것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규칙들은 고객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미사에 꼭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이웃이 아파서 병원에 데려다주기를 청하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미사에 나온다면 그것이 미사를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죄입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려는 목적으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미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혹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알면 그것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 존재이유를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바리사이처럼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노자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입을 벌리고 노자에게 물었습니다.

내 입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치아는 보이지 않지?”

보통은 딱딱한 사람들이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 살아있는 것들이 죽을 때 몸이 뻣뻣해집니다. 딱딱해지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도록 남아 있고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다 빠져 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딱딱한 것이 상처를 오래 간직하고 있지, 부드러운 것은 그 상처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치아는 한 번 썩거나 깨지면 빼내야하지만 혀는 치아에 씹혀서 피가 나더라도 조만간 곧 원상태로 회복됩니다. 상처를 받는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내가 너무 경직된 사람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물이나 공기에게 누가 상처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한 성인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그를 항상 괴롭히는 수도자도 있었습니다. 그 수도자는 질투가 나서 기회만 있으면 성인처럼 살고 있는 수도자를 비판하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성인 수도자는 그런 모함과 험담에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동료 수도자가 왜 잠자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만약 자네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상대가 받지 않는다면 선물은 누구에게 남아있겠는가?”

물론 계속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지?”

그런 거라네. 나는 그런 트집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네.”

 

부드러운 사람은 상처받지도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때문에 경직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위해서는 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느님을 위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모든 존재하는 원리를 알면 매우 단순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러 계명을 주시지 않고 사랑이라는 한 계명만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혹시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것들은 모두 주객의 전도가 일어난 그런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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