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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25 조회수973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Go out 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The 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the on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Signs like these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Mk.16,15-17)
 

제1독서 사도 22,3-16
복음 마르 16,15-18

제가 알고 있는 젊은 연인들 중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나이가 많은 커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더 연상인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는 거꾸로 여자가 연상인 것입니다. 이 둘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 둘이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를 어떤 설문조사를 보면서 공감하게 되더군요.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는 미혼 남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왜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느냐는 질문이었지요. 그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상의 여인들은 대체로 어떤 선물을 해도, 어디를 데려가도, 무슨 음식을 먹어도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고 기뻐하지 않아서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연하의 여성들은 무엇을 해주어도 처음인 듯이 놀라워하고 즐거워하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향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워하고 즐거워하는 등 감동을 받아야 상대방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앞서 말했던 그 연인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도 놀라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새로움을 가지고 서로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앞서 나이 많은 여성을 기피하는 미혼 남성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기피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보면 감동을 받을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것부터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드는 것까지 그 어떤 것도 감동 받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기에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바오로.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회심하여, 이제 박해하는 바오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 바오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체험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병이 생겨서 앞이 보이지 않고, 어떤 환청이 들리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체험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박해하는 자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거룩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감동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내 주변만 바라봐도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만큼 커다란 감동 투성입니다. 그 감동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주신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그냥 아무 감응 없이 이 세상의 방관자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을 증거하는 거룩한 사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칙칙해지지 말자. 미소를 지어 보라.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노라 에프론).



로마의 성바오로 성당 앞의 사도 바오로 동상



결혼 승낙(‘좋은 생각’ 중에서

사랑에 빠진 장끼와 까투리가 새들의 사제인 올빼미를 찾아갔다.

“저희가 결혼하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올빼미가 물었다.

“둘은 다투어 본 적이 있는가?”

장끼와 까투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올빼미를 쳐다보았다.

“신하게 다투어 본 적이 있느냐?”

다시 묻는 올빼미에게 장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투다니요?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니까요!”

올빼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진정으로 한바탕 다툰 다음 다시 오게. 그때 자제들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지 결정하겠네.”

까투리가 대꾸했다.

“다툴 거면 결혼을 왜 하겠습니까?”

장끼와 까투리가 돌아간 뒤 옆에서 지켜보던 산비둘기가 올빼미에게 물었다.

“왜 다퉈 보고 오라는 겁니까? 결혼은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올빼미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네. 사랑 못지않게 화해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사랑해보다 미안해 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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