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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28 조회수814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The teachers of the Law who had come
from Jerusalem said,
"He is possessed by Beelzebul:
the chief of the demons helps him
to drive out demons."
Jesus called them to him and began teaching them
by means of stories or parables,
"How can Satan drive out Satan?
If a nation is divided by civil war, that nation cannot stand.
(Mk.3,22-23)
 

제1독서 히브 9,15.24-28
복음 마르 3,22-30

성숙할 때까지의 성장기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긴 동물은 무엇일까요? 코끼리? 사자? 고래? 거북이? 아닙니다. 어떤 동물보다도 성장 기간이 가장 긴 동물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열세인 체력을 만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체력이 뛰어난 동물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우수한 두뇌가 필요했지요. 그리고 이 두뇌를 발달시키기 위해서 그만큼의 장기간의 성장기간이 요구된 것입니다.

따라서 단 시간에 무엇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단 시간에 이룬 내 자신이 무조건 맞다는 어리석음 역시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계속해서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겸손한 마음,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리고 성인 성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첫 모습은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고 그래서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을 알아가게 되었으며,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참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다보니 ‘겸손은 땅이다’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땅은 하늘보다 낮은 곳에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밟힙니다. 그리고 더러운 쓰레기까지 받아들이고 있지요.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겸손이 곧 땅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낮은 곳에 생명이 시작되며, 그 낮은 곳에서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낮고 밟히고 때로는 더러운 쓰레기까지 받아들여서 별 볼 것 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생명의 시작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겸손, 자신을 낮춰 생명의 싹이 움터 나올 수 있게 하는 겸손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비방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맞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존경과 사랑을 가득 받던 그가 이렇게 헛된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기에 자신보다 사랑과 존경을 받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특별한 교육도 받지 않았던 예수님께 고개를 숙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아니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향해 불평불만은 물론이고, 갖은 비방을 던질 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예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법. 바로 겸손 밖에 없습니다.

 

삶의 기적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면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기적과 만날 수 없습니다. 미래의 기적을 기다리지 마십시오(팃낫한).



어제 미사를 다녀온 고촌 성당의 십자가. 인상적이네요.



후회 없는 삶

세상에는 두 종류의 후회가 있다고 하지요. 그 첫째는 하고는 싶었으나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서 오는 후회, 그리고 두 번째는 실컷 용기를 내어 실천했지만 기대보다 성과가 좋지 못한 서운함에서 오는 후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후회가 더 나쁠까요?

당연히 해보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입니다. 해보지 못하면 아쉬움이 전혀 없어질 기회조차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일단 시도라도 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단 시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서 오는 후회를 더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또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 큰 후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지향하는 것. 이는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나의 후회를 그만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안에서 커다란 용기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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