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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30 조회수700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3년 1월 30일 연중 제3주간 수요일



“Hear this! A sower went out to sow.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Some seed fell on rich soil and produced fruit.
It came up and grew and yielded thirty, sixty, and a hundredfold.”
He added, “Whoever has ears to hear ought to hear.”
(Mk.4,3-9)
 

제1독서 히브 10,11-18
복음 마르 4,1-20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신부의 아버님 장례미사에 참석했다가 오랜만에 동창 신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반가웠고, 만나서 동창 신부들의 근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1학년 때 스스로 그만둔 친구 있잖아. 그 친구 이름이 뭐더라? 너랑 같은 방이었잖아.”

문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1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통학생으로 생활한 것이 아니라 같이 먹고 자고 공부했기 때문에 기억할 만도 한데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하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시기인 20년도 넘은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포기한 사람에 대해서는 기억을 잘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위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포기했었다면 우리들은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포기하지 않았기에 우리들이 기억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포기를 한다면 제 입학 동창처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삶이 중요합니다. 포기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통과 시련에 대해 너무 쉽게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고 하지요. 그만큼 고통과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씨는 여러 군데에 뿌려지지요.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길에 뿌려져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는 것을 본다면, 또 돌밭에 떨어져서 솟아오르는 태양 때문에 타 버리는 것을 본다면,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 “나는 안 돼.”라면서 포기해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했을 때에는 실패의 기억만 남았겠지요. 복음에서는 한 가지가 더 나오지요. 바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그리고 이 씨앗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분명히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의 기회를 주었다. 우리는 그 기회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탈 벤 샤하르).



매일 보는 답동성당인데 어제는 달라 보이더군요.



원망하기? 감사하기?

어느 신부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당신이 당한 교통사고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교통사고를 통해서 차가 거의 폐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에구, 아끼던 차가 폐차가 되었으니, 기분이 무척 안 좋으셨겠어요.”

그런데 이 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세요.

“차는 망가졌지만 그렇게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하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분명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원망하더라도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는 ‘원망하기’를 선택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신부님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원망하기’를 선택했다면 그냥 그 순간 동의하는 수준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기’를 선택하는 신부님을 보면서 ‘정말로 대단하다.’라는 생각과 함께 존경하게 됩니다.

우리는 ‘원망하기’와 ‘감사하기’,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기로에 종종 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떤 것을 선택해야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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