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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나다!" (탈출 3,14)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2 조회수724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3년 다해 연중 제4주일


<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복음: 루카 4,21-30






물 위를 걷는 베드로


보라싸(Borrassa) 작, (1411-13),  타라사 산 페드로성당


     < "나는 나다!" (탈출 3,14) >

       황창연 신부님은 평창에 생태마을을 짓고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강연 내용 중에 특히 기억나는 것이 암에 걸린 한 자매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얼굴까지 검게 되었는데 남편이 설명하기를 간까지 암이 전이되어 3개월밖에 못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이 지어놓으신 황토집이 좋아서 살아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과 또 열분 정도의 암환자가 있었는데, 황창연 신부님이 강의를 하실 때 다른 분들은 다 웃는데 그 자매님만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안 웃느냐면 앞으로 3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걱정과 두려움에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그 자매님을 불러서 이렇게 혼내셨다고 합니다.

자매님, 내일 걱정은 내일 하세요. 앞으로 3개월을 살지 3년을 살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냥 오늘 하루 감사하면서 기쁘게 사세요.”

그 자매님이 며칠 만에 황토집에서 나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느님께서 저에게 50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3개월 동안 다 감사하기도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웃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항암치료를 하러 갔다가 확 바뀐 얼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5년 동안 항암치료 하면서 매번 토하고 울었는데, 한 번도 토하지 않고 편하게 치료를 받아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습관이 들었고 다른 암환자들에게도 감사하라며 설득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모든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고, 5년이 지난 지금은 머리에 파마까지 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계기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결국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신부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오던 것을 버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누구든 이 버리는 것이 힘들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요셉의 아들정도로밖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이 말에 고향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분을 자신들의 주인으로는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에게 화를 내고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그분과 대적하는 라고 불리는 것이 자아, 곧 에고라고 합니다.

 

자아의 상징적인 모습은 창세기 처음부터 나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이 바로 자아’, 혹은 에고라고 하는 것의 상징입니다. 뱀의 말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고, 뱀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계속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말을 들으면 감사하라는 신부님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자아의 말을 들으면 예수님은 그저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인 것입니다. ‘영성은 바로 이 자아를 버리는 과정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않고 자아가 바로 마귀라고 대답하신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주는 것도 바로 자아인 것입니다. 사실 자아자신은 아닙니다. 뱀이 하와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아는 유혹하는 역할이고 자신은 선택하는 역할입니다. 따라서 참 자신은 자아가 아닌데, 자아는 화가 나는, 혹은 두려워하는 자신이 참 자신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 나’, 혹은 참 자기()’는 스스로 자신이 라고 주장하는 에고(자아)’가 아닙니다. 에고는 자신이 나라고 믿게 만드는 가짜 입니다. 그러나 참 나는 아브라함처럼 어디로 향할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는 선택권이 있는 자신입니다. 문제는 자신은 자신 혼자서 라고 할 수는 없고 무언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믿는 것과 결합하여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라고 말하는 것은, 내 자신이 자아와 결합하여 내가 화난다. 내가 두렵다. 내가 기쁘다등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집트 땅에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믿습니다. 파라오도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원인이면서도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을 버리고 떠나게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 파라오가 바로 가짜 나이고 에고이고 나를 노예로 만드는 내가 버리고 떠나야 하는 고통의 근원이며 싸워야 할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파라오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인이 파라오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자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주인을 깨닫고 지금까지 주인으로 생각했던 파라오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음을 알려주는 모세와 같은 해방자가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아를 버리고 해방자를 믿고 따를 수 있는 용단도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면서 당신의 이름이 바로 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참 주인은 내가 지금까지 나로 불러왔던 자아가 아니라 하느님 한분뿐이신 것입니다. 그분을 나의 참 나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자아를 떠나는 과정이 영성이고 행복으로 다가가는 길입니다.

 

임언기 신부님의 강의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이 미리내에 계실 때 어떤 신자들이 병자성사를 청해서 갔다고 합니다. 간암말기로 한 할아버지가 임종을 맞고 있었습니다. 30년 이상 냉담한 분이라 고해성사부터 주기 위해 사람들을 내보내고 둘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워낙 오래 보지 못해서 그런지 알고 고해성사 보는 방법과 대죄를 십계명, 칠죄종을 들어가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기에 이번에는 당신이 죄를 읊고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신부님이 영대를 풀고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 죄 없어!”

30년을 냉담했는데 어떻게 죄가 없겠습니까? 죄 없다고 믿게 만든 자아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려 자아와 자신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자아는 우리의 참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기가 참 나라고 믿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도록 한 것이 곧 자신들이 그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로 믿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과 멀어지려 하면 갖은 고통을 주어서 두렵게 만드는데, 사실 고통은 자아가 받는 것이지 본래는 우리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를 비판하고 무시하고 험담을 하였다고 합시다. 자아는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것들이 실제로 나를 더럽히거나 깔고 뭉갠 것입니까? 실제로 자신은 그런 말을 듣던지 안 듣던지 그저 변하지 않는 자신일 뿐입니다. 누가 나무에게 너 참 잘났다, 혹은 너 참 못났다 한다고 해서 그 돌의 본성이 변하거나, 화가 나고 기쁨이 솟구치겠습니까? 이렇게 화를 내는 대상은 나의 참 본성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주인이라고 믿게 만드는 가짜 나인 자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정원씨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미워하고 분노하는 자아를 버린 것입니다. 자아를 버리고 하느님을 바라볼 때 용서할 수 있고 평화를 얻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를 버리는 방식은 불교나 명상센터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저 자신을 내려놓아 공()이 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아를 바라보든지 아니면 나를 찾아온 참 주인을 바라보든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집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은 집과 같아서 누구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느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과 같은 참 나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자아와 창조자 둘 중의 하나만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할 뿐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몰입하여 어떤 것에 정신이 빠져있다면 나는 사라지고 그 몰입되어 있는 대상이 나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무아지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을 잊는 것이 무아지경이고, 기도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나의 참 해방은 나의 가짜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참 주인을 바라보며 자기를 버리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부터 시선을 돌려 세상 것을 바라볼 때 자신의 가짜 자아에게 사로잡혀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와도 아담을 바라보지 않고 뱀을 바라보았고, 또 아담도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모든 죄와 고통이 시작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 위를 걷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면 주위의 모든 것이 자아가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걱정, 고통, 집착들로 쌓여있습니다. 그것들에 빠져들면 말 그대로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나다!’라고 하시며 우리의 참 주인이신 그분이 당신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참 주인만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고통들은 발밑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성당에 올라왔는데 한 할머니가 유아방에서 구토를 하고 쓰러져계셨습니다. 저는 앰뷸런스를 불러 함께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할머니는 의식이 없으신 데도 무언가를 계속 반복해서 외우고 계셨습니다. 저는 귀를 대고 무슨 말인지 들어보았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외웠던 그 말은 단 세 마디였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예수, 마리아, 요셉, 예수, 마리아, 요셉...”

그분은 내가 죽는구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주인은 예수, 마리아, 요셉이었기에 돌아가셔도 그것이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마구간이 예수, 마리아, 요셉을 주인으로 모셨을 때부터, 나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그 집의 주인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한 집의 주인이 둘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인 가짜 나를 무엇 때문에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요한 23세는 라는 일인칭 주어를 한 번도 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참 주인을 우리의 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나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를 떠나기 위한 목적은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매 순간 감사할 수 있다면 이미 나의 참 주인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믿어도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불평하는 파라오를 떠나 더 자주 감사의 예배를 올리려 노력해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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