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랑의 발견 -묻혀있는 보물- 2013.2.3 연중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3 조회수35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3.2.3 연중 제4주일 예레1,4-5.17-19 1코린12,31-13,13 루카4,21-30

 

 

 

 

 



사랑의 발견

 

-묻혀있는 보물-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랑입니다.

곳곳이 사랑의 보물 밭이자 사랑의 노다지입니다.

오늘은 ‘사랑의 발견’이란 주제로 묵상을 나눕니다.

 


사부 베네딕도는 당신 수도승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라 하셨는데

저는 형제적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사랑은 발견’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제 서울분도수녀원의 종신 서원 식을 전후로 한 일화입니다.

우리 분도수도원과 분도수녀원은 오누이 같은 관계이고,

수녀원은 우리 수도원에

미사 때 복사할 몇 분 수사님과 더불어 저에게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고,

저는 몇 분 수사님과 제 대신 작은 신부님을 보내기로 내심 작정했습니다.


이런 의견을 피력했을 때 수도형제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이었습니다.

 

“원장님이 가셔야 됩니다. 어른이 가셔야 됩니다.”

 


듣는 순간,

‘아, 이게 형제들의 건강한 사고, 건강한 충고, 건강한 사랑이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형제들의 깨끗하고 건강한 사랑을 발견했고,

즉시 제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형제들의 사랑의 충고가 고마웠고

이런 사랑의 충고 또한 용기임을 깨달았습니다.


수녀님들 역시 반가움과 고마움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 수도형제들을 환대했고 미사전례 역시 수사님들의 매끈한 복사로

아주 품위 있고 안정감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정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장상인 제가 참여하는 것이 수녀원 측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음 또 하나의 사랑의 발견 역시 저에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본원에서 수련원의 젊은 수도형제들 피정지도를 하며 있었던 체험입니다.

 

매 강의 시작 전 뻔히 아는 이름들이지만

저는 ‘부르심과 응답’의 사랑의 성소를 확인한다 하며

용기를 내어 한 형제 한 형제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맞췄습니다.

 

순간 힘차게 대답하며 호기심과 반가움에

환히 빛났던 수도형제들의 얼굴빛과 눈빛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대로 초등학교 교사 시절, 이름 불렀을 반갑게 반응하던

초등학생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발견에 고무되어

얼마 전 정기적으로 피정을 오는 나이 든 자매님들 역시

강의 전 이름을 불렀고 모두가 환한 얼굴에 빛나는 얼굴로 힘차게 대답하니

마음은 그대로 초등학생들 같았습니다.

 


새삼 사랑은 발견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눈이 가려 발견치 못하는 덮여있는 사랑은, 묻혀 있는 사랑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러나 사랑이 이상이라면 갈등과 불편, 불화, 분쟁은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결코 내 갈등과 불화의 자리에서 도피하지 마십시오.

 

바로 지금 여기 불화와 갈등의 자리가 사랑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의 발견에 실패하면

다른 어디서도 사랑 발견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의 예레미야, 2독서의 바오로, 복음의 예수님의 세 주인공들이

처한 환경이 대동소이합니다.


절대로 온실 같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환경이 아닙니다.

아주 불화와 갈등, 투쟁의 영적전쟁 치열한 현실입니다.

 


사실 밖에서 평화로워 보이는 수도원이나 가정도

안에 들어가 보면 영적전쟁 치열한 최전방인 경우가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제가 이런 착안을 하게 된 것은 소위 사랑의 찬가라는 2독서에 대한

다음 주석 한 구절입니다.

 


‘사실 1코린 13장은 찬가(hymn)가 아니라

  영적은사를 뽐내던 이들에 대한 훈계(instruction)다.’

 


분쟁이 꽤나 심해 바오로 사도에게 골치 덩어리였던

코린트 교회에 대한 사랑의 훈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의 자리는

분열과 갈등, 분쟁이 극심했던 코린트 교회라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처한 현실 역시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복음의 예수님의 위태한 처지 역시 예레미야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의 삶을 사셨던 세 분의 사랑의 대가,

예수님, 예레미야, 바오로였습니다.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을 깨달아 체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도 하느님 사랑의 은덕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뒤안길을 잘 보면 하느님 사랑의 발자취이며

우리의 존재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노다지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발견은 동시에 감사의 발견, 행복의 발견으로 직결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발견할수록 원망은 감사로 불평은 찬미로 바뀝니다.

 


정말 하느님께 청할 것은 하느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불화와 시련의 공동체를 살아낼 수 있는 힘입니다.

예레미야가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이런 예레미야의 하느님 사랑의 소명 체험이

온갖 난관을 극복케 한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세례 때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의 체험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마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의 예수님 자신의 신원 체험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당신의 길을 가게 하였음은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또렷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 끝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예수님의

악의 세력에 대해 사랑의 결정적 승리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사랑의 체험은 늘 읽고 들어도 감동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 체험이

바오로 사도를 백절불굴, 신앙의 용사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눈이 열려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사랑함으로 사랑을 깨닫고 배웁니다.

 

내 자신이 무궁무진한 사랑의 노다지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영적부자는 사랑이 많은 자입니다.

가진 자는 더 많이 받아 넉넉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사랑을 끊임없이 실행하는 부자를 지칭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점차 영적 가난뱅이 허무한 인생으로 전락하니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제 수도형제들 하나하나 사랑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사랑입니다.

물리거나 질리지 않은 밥 같은 사랑, 깨끗한 형제적 사랑입니다.

자랑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생략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헌장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랑이요, 친절한 사랑입니다.

시기하지 않는 사랑, 뽐내지 않는 사랑, 교만하지 않은 사랑,

무례하지 않은 사랑, 자기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

성을 내지 않는 사랑, 앙심을 품지 않는 사랑,

불의에 기뻐하지 않는 사랑,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 실천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최고의 박사가 사랑박사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지녔어도 이런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 희망, 사랑, 세 가지는 영원히 남지만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과연 이 사랑에 내 사랑을 점검해 볼 때 내 사랑 지수는 얼마나 되겠는지요.

 


이 모든 사랑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랑의 원천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수록 마르지 않는 사랑의 발견에 실천이요

사랑을 실천할수록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게 되니

영적 부익부의 풍요롭고 충만한 삶이 됩니다.

 

 

 

 

 


내적 성장과 성숙은 그대로 사랑의 성장이요 사랑의 성숙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발견하고 실행해 갈 때 잘 익어가는 사랑입니다.

 


인생사계란 말이 있습니다.

과연 내 나이는 계절로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디에 와 있는지요.

그 인생 계절에 맞게 사랑의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하느님은 우리 인생을 수확할 때 사랑의 열매로 우리를 심판하신다 합니다.

끝으로 유안진 시인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도 약해지고 여려져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게 되네요.

  독기가 없어진 거죠.

  그런데 생각해요.

  항상 땡감이면 맛있겠나.

  땡감이던 시절을 지나 단감도 지나고 홍시가 돼 흐물대는 거라고.”

 


마치 인생 가을이 되어 잘 익은 사랑의 열매를 대하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랑의 샘’인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항구히 사랑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