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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4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4 조회수708 추천수17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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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시대 악령>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오는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무덤은 산 사람이 거처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곳입니다. 그는 아마도 빈 무덤이나 무덤 사이에 굴을 파서 그 안에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악령 들린 이 사람은 얼마나 힘이 세고 난폭하던지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큼만 나면 손에 잡히는 데로 부숴버리기 일쑤였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힘센 장정들이 여럿 달려들어 그의 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장사였던지 쇠사슬과 족쇄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괴물 같은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멀찍이 피해 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그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역시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 민가와는 멀리 떨어진 산이나 광야, 무덤가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들이 가끔씩 현실로 돌아올 때도 있다지요. 그럴 때 마다 참혹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억울함과 비참함을 달래기 위해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울며불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비친 기괴한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이게 과연 사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은 게 더 낫다며 자해행위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기도 했고 큰 돌로 자신의 몸을 치기도 했습니다. 악령으로 인해 그의 미래는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객사, 아니면 동사, 아니면 자살...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악령 들린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권능의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악령은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신 것을 보고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이유로 완전히 자신을 낮춥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예수님의 기에 완전 눌린 악령들은 완전한 무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령이 하느님의 능력과 위엄에 호소하며 자신의 거처인 악령 들린 사람에게서 쫒아내지 말아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지옥의 괴로움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외치시며 악령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 안에 6826마리의 악령이 붙어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악령들과 당당히 맞서시며 악령 들린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생명을 부여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성매매,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하루 빨리 돼지 떼들로 옮겨가기 바랍니다. 돼지 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악령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비탈길을 내리달려 호수 안으로 뛰어들기 바랍니다.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해 신자 여러분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 몇 자 적습니다.>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영화가 방영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또 그가 못 다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수도회 회원으로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전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현재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여러 상황 앞에서 말 못할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애초에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런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사회 현상 앞에서 이런 과도한 열기가 빨리 식도록 침묵 속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살레시오회 전통에 따르면 한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아무리 그의 성덕이 출중하다 해도 일단은 침묵과 기도 속에, 하느님 자비의 손길 안에 그를 맡겨드리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입니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은 그 어떤 사람에 앞서 한 수도자였습니다. 수도자가 첫째로 지녀야 할 덕은 겸손의 덕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은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많은 일을 했다 할지라도, ‘저는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외치며 예수님 뒤로 숨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실 살아생전 이태석 신부님 역시 무척이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수도 별로 없었고 자신을 알리고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수도자로서 당연한 모습이지요. 혹시라도 이태석 신부님이 지금의 과도한 열풍을 봤다면 얼마나 어색해했을까 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한 형제를 평가할 때는 그의 외적, 사목적, 활동적 측면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생활, 하느님과의 관계, 동료 인간과의 관계..등등 종합적으로 고려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오류가 없어야하기에 오랜 세월을 두고 신중하게 작업에 임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내부적으로 침묵과 기도 속에 그의 생애를 정리하고, 이런 사회 현상 안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천천히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희의 의도와는 달리 영상물 ‘울지마 톤즈’ 이후 계속 제작 방영된 영상물의 여파로 인해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생애가 전 국민적으로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 기업들, 단체들이 앞 다투어 그를 기리는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영상물, TV 광고, 소설, 만화, 전기, 수필, 기념 재단, 기념관, 박물관, 동상건립, 이태석 신부님 이름을 건 다양한 이벤트, 장학회, 시상식...

 

물론 이태석 신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다양한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실제 이태석 신부님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왜곡, 과장, 훼손이 그간 벌어졌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서 이태석 신부님을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렸습니다. 로마 유학 시절 있지도 않은 일을 실제처럼 묘사해서 당혹감에 빠트렸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다른 수도회 수도복을 입혔습니다. 그는 사제로 죽었는데 건립된 기념 동상은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기념 재단을 만드는데 ‘이태석’이라고만 썼지 ‘신부’라는 단어를 뺐습니다. 아직 시기상조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생가를 복원하고 성역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재단에서 이태석 신부님 이름으로 장학금, 선교기금 등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형제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지나친 과열 현상, 왜곡, 과장, 훼손을 더 이상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소속 수도회로서 고인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들이 올바로 시작되고 이행되도록 자문 역할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을 상업적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의 시도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다는 의무감도 가집니다. 이런 배경으로 저희 살레시오회는 ‘이태석 신부와 관련된 공지문’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도 끊임없이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다양한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에 대처하느라 몇몇 형제들은 밤잠도 못잘 지경입니다. 때로 너무나 무리하고 황당한 요구 앞에 할 말을 잊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과도한 열풍이 하루라도 빨리 잠잠해지는 것이 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침묵 속에 기도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품안에 이태석 신부님을 내려놓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고 평가하시도록 맡겨드릴 일입니다. 이제는 이태석 신부님 뒤에 서계시는 예수님께, 돈보스코 성인께, 또 다른 선교사들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생전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실천할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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