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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8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8 조회수644 추천수12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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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 마르코6,14-29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악 앞에 더 큰 선으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통치권자였습니다. 두 지방을 합해봐야 경기도 정도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왕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었습니다. 굳이 칭하자면 영주, 분봉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아첨하며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둘의 관계는 참으로 묘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두렵게 여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 세례자 요한이 곤경에 처할 때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건네는 날카로운 직언에 힘겨워했지만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치도 않았던 기가 막힌 일-세례자 요한의 참수-을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모든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잔머리를 너무 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갖은 꼼수와 권모술수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결국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 나바태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보기 시작하자 힘이 딸렸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와 협상을 체결합니다. 작은 강아지가 큰 개를 만나면 배를 발랑 뒤집어 항복을 표시하듯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레타 4세 왕 앞에 깨갱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왕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만족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헤로데 필립보스를 찾아가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합니다. 갖은 감언이설로 꼬셨겠지요. 허영심이 가득했던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륜을 저버리고 결혼을 승낙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레타 4세 왕의 딸은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가버리게 되지요. 헤로디아는 헤로데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난 딸 살로메를 데리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품에 안깁니다.

 

    당대 비리와 악행을 자행하던 고위층 지도자들의 천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공공연하게 천륜을 거스르는 두 사람의 악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개인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듭된 고발에 헤로데 안티파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끄럼 없이 패륜의 길을 걷던 헤로디아는 복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위협도 해봤습니다. 설득도 해봤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전도차 애논을 떠나 갈릴래아로 건너온 세례자 요한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사해 동쪽 에브론 건너편에 위치한 마케론데 성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 서기 28년경 참수 당함으로서 짧은 예언자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선 악이 선을 제압한 것 같아 큰 서글픔과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악 앞에서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더 큰 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그 당당함, 흔들리지 않는 신앙 앞에 큰 감동도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두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지역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어린 양들을 까마득한 절벽 앞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웃이 쓰러지든 말든 내 앞길만 헤쳐 나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합니다.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반대의 깃발을 올리노라면 즉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분개를 사고, 누군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기도 십상입니다. 때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혀 고독하고 쓸쓸한 길을 홀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진리의 길, 예언자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적대자들의 박해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갖은 중상모략과 음모 앞에서도 그 얼굴이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밝히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리도 의연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부여되는 과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 세상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활짝 웃으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까지 우리의 시야가 넓혀져야겠습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본다할지라도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화에 맞서 하느님 사랑의 문화를 외치는 것입니다. 갈등과 반목에 맞서 화합과 용서를 외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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