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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ㅋㅋㅋㅋ2월9일(토) 聖미카엘 코르테로, 聖女아폴로니아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08 조회수366 추천수1 반대(0) 신고


2월9일(일) 음1/10

聖미카엘 코르테로, 聖女아폴로니아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2.9)

 

성인명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축일

2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육자

활동지역

에콰도르(Ecuador)

활동연도

1854-1910년

같은이름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키


 


에콰도르의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1854년 11월 7일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쿠엥카(Cuenca)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싸운
유명한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Leon Febres Cordero) 장군이며,
그의 아버지는 국내 정치 사안에 영향을 끼치던
프란치스코 페브레스 코르데로 몬토야(Francisco Febres Cordero Montoya)였다.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매력 있는 교양인이었으며 5개 국어에 능통했다.
성인이 태어날 즈음에는 쿠엥카의 신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의심할 필요 없이 성 미카엘의 성소는
그의 어머니인 아나 무뇨즈(Ana Munoz)
신심 깊은 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학자 성인의 탄생을 위해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성 미카엘은 9살 때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 4월 7일)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쿠엥카에 세운 학교의 첫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접하게 된 지성의 생활과 수도회의 겸손한 생활양식을 사랑했다.
그래서 후일에 기록하기를
“수도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언젠가 거룩한 수도복을 입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언제나 수사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가족 중에서 사제가 나온다면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평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하였다.
수도생활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성 미카엘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사로서 아들의 성소를 인정하였다.

1868년 3월 24일 그는 쿠엥카에서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으면서
미카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그 수도회 최초의 방인 성소자로 입회하여 수도복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모교에서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으며,
일 년 후 키토(Quito)의 학교로 발령받았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6년 된 학교에는 250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다시 6년 후 학생 수는 천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이 쓴 많은 책 중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세속 과목들을 가르치고 집필하는 것은 그의 첫째가는 기쁨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쁨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사도적 성소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 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교육자로서 성 미카엘의 재능은
키토의 학교들의 공식 검열관으로 지정되면서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교육과 수도생활 중에 학자로서의 임무를 지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 미카엘은 교과서를 쓰고, 교리교재, 시와 그리스도교 영성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는 카스티야(Castilla) 에스파냐어 연구에서 특출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중 몇 권은 에콰도르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 교재가 되었다.
결국 그는 1892년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된 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
프랑스 학술원, 베네수엘라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3월 성 미카엘은 프랑스어로 된
더 많은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 시민사회와 종교의 불안한 기운은 수도회의 작품을
프랑스 외부에서 지속시킬 수 있도록 드 라 살 연구소(De La Salle Institute)
문서들을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야 할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4월) 앓게 되었으나,
병이 낫자마자 파리의 세브르 거리에 있는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 방이 있고, 책이 있으며,
근처에 성당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행복이다.”

7월에 그는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에 있는
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의 총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더 많은 집필을 위해 유럽에 계속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번역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의 청원자 숙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에스파냐어를 가르쳤다.
1909년 7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어 시민들이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 재산을 파괴하여 모든 수도자들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1910년 1월 감기에 걸린 성 미카엘 수사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교사와 학자로서 성 미카엘 수사의 명성은 그의 성덕과 일치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그에 대한 대중신심이 생겼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는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성 미카엘의 첫 전기 작성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에콰도르의 형제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변질되는
외적 아름다움의 은총을 받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그의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구부정했다.
용모는 어두웠고 여위었으며, 금욕 실천과 지병으로 인한 주름살이
깊은 고랑을 이루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표정은
그의 영혼과 하느님의 은총의 조명으로 인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평화롭고 친절한 본성에서 나오는 온순함이 흘러넘쳐
반향된 것이다.
그의 매우 가는 입술은 항상 지속적이고 은총 가득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은 가장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었으며,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에 기인할 수밖에 없는
고요함과 기쁨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그의 생김새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표현은 조용하고 침착한 정신이
그 밑에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성 미카엘의 유해는 1936년 스페인 내전 중에 에콰도르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1937년 2월 5일 에콰도르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짧은 시간 안에 키토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성지순례의 중심이 되었다.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였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공공 공원에 기념물을 세웠다.
1955년 6월 4일 3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거대한 행진 후에
동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성 미카엘은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Mucianus Maria Wiaux, 1월 30일)와 함께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요? '

젊은 날의 다짐으로

에쾨도르의 교육자, 학자로서

주님의 일에 정성을 다하신

성 미카엘 코르테로 님이시여

 

성소를 지님 젊은이들이 주님의 음성을 잘 알아 듣도록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아폴로니아(2.9)

성인명

아폴로니아(Apollonia)

축일

2월 9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249년

같은이름

아뽈로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아폴로니아(Apollonia)의 순교

 

 



 
 

 
데키우스 황제의 전임자인 필리푸스 황제의 통치 말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폭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거리에서 고문하고 살해하는 참극이 있었다.
희생자들 가운데 연로한 여부제(diaconissa)였던
성녀 폴로니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1월 17일)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인 파비우스(Fabi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녀 아폴로니아의 순교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다.

“아폴로니아를 붙잡은 이교도 선동가들은 그녀의 얼굴을 때려
이를 모두 부러뜨렸다.
그리고 도시 성문 바깥에 화장용 장작 기둥을 세워 놓고는
자기네들을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 모독의 말이나
이교도의 신을 부르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산 채로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갑자기 불로 뛰어들어 타 죽었다.
 
” 성녀 아폴로니아가 고문을 당할 때 이빨이 뽑히는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상징은 목걸이 끝에 황금 치아를 매달고 있거나
이빨을 뽑는 집게로 표현된다.
그래서 성녀 아폴로니아는
치아환자나 치과의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리아의 길거리 폭도들에게서

이가 모두 부러뜨러지도록 맞고

화형의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성녀 아폴로니아 부제님이시여

 

사소한 일에도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천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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