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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ㅋㅋㅋㅋ2월14일(목) 聖 치릴로, 聖 발렌티노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13 조회수355 추천수1 반대(0) 신고


2월14일(금) 음1/15

聖 치릴로, 聖 발렌티노

 


 
 
 

치릴로(2.14)
성인명 치릴로(Cyril)
축일 2월 1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826/827-869년
같은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성 치릴로(Cyrillus)와 성 메토디오(Methodius)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
그의 형인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왕립 학교에 보내져서
성 포티우스(Photius, 2월 6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 그 대학에서 스승 성 포티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성 메토디우스는 옵시키온(Opsikion)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는 총독이 되었다가 사직한 후로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는 보스포루스(Bosporus)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황제 미카엘 3세가 러시아의 드니에프르(Dnieper) 강과 볼가(Volga) 강변에
사는
카자르족(Khazars)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그들은 카자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성 키릴루스는 이후 몇 달 동안
교황청립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성 메토디우스는 소아시아 헬레스폰트(Hellespont)
폴리크로니온
(Polychronio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Moravia) 왕국의 왕 로스티슬라프(Rostislav)의 요청에 따라
성 포티우스 주교는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해 파견하였다.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두 형제의 슬라브어 실력은 대단하였다.
성 키릴루스는 선교를 위해 성서를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 키릴루스는 성 메토디우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일 성직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동안 라틴어만 사용하던 교회의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한 것과 또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왔으므로
혹시 서방교회의 이단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파사우(Passau)의 독일 주교가 사제 후보자 선발을 거부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 사건으로 두 형제는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로마(Roma)로 가던 중에 교황이 서거하였다.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두 형제는
크림(Krym) 반도에서 서거한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
유해를 인도하여
교황의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성 키릴루스는 수도자가 되었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모라비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869년 2월 14일 수도원에서 운명하여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한편 성 메토디우스는 교황 특사로서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돌아갔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Pannonia)
독일 교계제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성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870년 독일의 왕 루드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Ratisbon,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 시노드에서
성 메토디우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3년간 스바비아(Swabia)에서 귀양생활을 하다가
교황 요한 8세(Joannes VIII)의 중재로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한 8세 교황은 슬라브 지역에 대한 사도좌의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개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계속 적대적인 시선으로 성 메토디우스의 활동을 지켜보던
독일 교회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그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성 메토디우스를 이단자로 고발하였고,
880년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교황에게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한 끝에
결국 교황은 교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
통해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882년 교황의 뜻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성 메토디우스는
제자 두 명의 도움으로 동생의 뒤를 이어
성서와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독일 교회와 성 메토디우스 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결국 그 모든 투쟁은 그가 건강 악화로 인해 885년 4월 6일 파스카 목요일에
자신의 주교좌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그는 참으로 힘든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성 메토디우스와 성 키릴루스는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로 불리며,
동유럽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가 행한 전례는 오늘날의 러시아 전례가 되어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온다.
그들의 축일이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은 188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
회칙에 의해 이루어졌고, 198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을 통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 함께 이들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치릴로의 형인 성 메토디우스(Methodius)님을 합께 기념합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슬라브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여
슬라브 잔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주장한
슬라브인들의 사도이며
유럽의 수호성인이신

성치릴로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 님이시여
현세 교회의 혁신과 발전을 위하여
천상의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
아멘

 


 


발렌티노(2.14)

성인명

발렌티노(Valentine)
축일 2월 1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의사, 순교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269년
같은이름 발렌띠노, 발렌띠누스, 발렌타인, 발렌티누스



로마의 성 발렌티노(Valentinus)


 
 

로마 순교록에는 발렌티누스라는 두 명의 성인을 2월 14일에 기념하고 있다.
한 사람은 로마의 사제이며 의사인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 발렌티노)로서
클라우디우스 2세 황제의 박해 때인 269년에 순교하여
플라미니아 거리(Via Flaminia)에 묻혔다.
 
다른 한 사람은 로마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테르니(Terni)
주교인 성 발렌티누스로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유해는
후에 테르니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의 순교에 대해서는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순교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두 명의 순교자가 실제로 현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다르다.
두 명의 발렌티누스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테르니의 발렌티누스가 로마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로 인해 로마와 테르니에 두 개의 전통이 생겨난 것이지
실제로는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본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달리 전해진 것일 뿐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더 많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발렌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어떤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 관리에게는 앞 못 보는 양녀가 하나 있었다.
성 발렌티누스가 이 양녀의 눈을 뜨게 해주자 이에 감동된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전 가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널리 퍼져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성 발렌티누스는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성 발렌티누스의 축일을 연인들의 축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14세기부터이다.
연인들이 이날 서로 주고받는 특별한 형태의 축하 카드도 성행하였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기사도적 사랑의 표현에서 나타난 것으로도 생각된다.
즉 이 전통에 따르면 매년 2월 14일이 되면 젊은 여인들이
‘발렌틴’(Valentin), 이른바 자신들을 흠모하여 시중을 드는 기사를 선택하고
이 기사들은 젊은 여인들에게 선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아직도 영국의 몇몇 지역에서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념하는
발렌타인 축일의 여러 가지 의미와 형태는
상인들이 상업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발렌티노 성인이 연인들의 수호성인이 된 것에 대한


그럴듯한 해답을 주는 이러한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의 결혼을 금했는데

발렌티노 성인이 이를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몰래 혼인시키다가

발각돼 2월14일 순교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성 발렌타인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젊은이들이
주님 평화 안에서의 건전한 사랑을 나누도록
천상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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