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작은 고통으로 더 큰 행복을/신앙의 해[88]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15 조회수408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림 : [터키] 에페소 사도 요한 성당 뒷면

옛날부터 많은 이가 단식을 했다.
단식에 관한 기록 역시 많다.
하지만 공통 요소는 언제나 ‘하늘의 기운’을 얻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민족의 회개가 요구될 때는 늘 단식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단식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슬람의 ‘라마단’은 한 달 동안의 단식이다.
그들은 ‘해가 있는’ 낮 시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여행자나 환자의 경우는 제외되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빠진 날수만큼 보충해야 할 게다.
지독스런 단식이다.
희생 없이 절제는 생겨나지 않는다나.
이러한 절제 없이 본능은 조절되지 않으리라.
단식 역시 그 근본은 ‘절제의 훈련’이리라. 
 

왜 단식하는지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신 때문’이라고 분명히 알리셨다.
당신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단식하란다.
당신의 십자가에서 우리도 십자가를 지란다.
이런 의미의 단식이 아니면 그저 남에게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일’에 불과하다.
속죄와 보속으로 예수님은 단식을 당신 수난과 함께하게 하셨다.
평범한 단식을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승화시키신 것이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혼인 잔치는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의 일치이다.
의로우신 하느님과 죄인이었던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거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일치를 이루게 하셨다.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지 못한 채 죄인으로 남는다면 잔치는 깨어진다.
우리로 말미암아 ‘신랑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런 죄인인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고자 단식으로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가, 성한 이와 성하지 못한 이가,
힘없는 이와 권력을 가진 이가 화해와 일치를 이룬다.
이것이 또 하나의 혼인 잔치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셨고,
십자가를 지신 채 성치 못하신 몸을 선택하셨으며,
도살당하는 어린양처럼 힘없는 분이 되셨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 성치 못한 이들,
힘없는 이들이 부유하고 건강하며 힘 있는 이들에게서 소외된다면
그것이 바로 ‘신랑을 빼앗기는’ 상황이다.
바꾸어 보면, 우리 삶의 자리에서 굶주리는 이들이 늘어 가고 병자들이 내버려지며,
힘없는 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단식을 하라는 하나의 표징일 게다.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절제와 극기로 형제애를 실천해야 할 때임을 알려 주는 신호인 것이리라.
 

사실 바리사이는 단식을 엄격히 지켰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적군에게 불타 버린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당한 이 국가적 재앙과 수모를 비통해 하면서 단식을 했다.
국가적 재앙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다면 그 이유가 있다.
빛의 생활이 부족한 탓이리라.
그러기에 적선과 자선의 생활을 권고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가슴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지고 가는 지혜를 청하자.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게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도 사도들처럼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기뻐하며
이 사순을 무겁게만 지내지 않기를!
그리하여 작은 고통으로 더 큰 행복을 얻도록 하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